색상환과 조화
미술 시간에 받은 색상환에서 빨강의 맞은편은 초록이었다. 그런데 디자인 프로그램의 색상환에서 빨강의 맞은편은 청록이고, 빨간 종이를 한참 보다가 흰 벽을 보면 떠오르는 잔상도 청록에 가깝다. 어느 쪽이 "진짜" 보색일까. 이 장은 색상환이 하나가 아니라는 데서 출발해, 색상환 위의 도형으로 배색을 만드는 공식들을 직접 돌려 보고, 그 공식이 어디서 잘 맞고 어디서 무너지는지를 확인한다.
- 화가의 RYB 색상환과 지각 색상환(OKLCH)이 색상을 다르게 배치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 "보색"에 섞어서 회색이 되는 짝, 빛으로 더해 흰색이 되는 짝, 잔상으로 보이는 짝이 있음을 구별한다.
- 보색·유사색·삼각·분할 보색 배색을 만들고, 같은 공식이 색상환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을 본다.
- 조화 공식이 명도와 채도를 정해 주지 않는다는 한계와, 조화에 관한 연구의 근거 수준을 안다.
- 오방색처럼 색상환이 아닌 방식으로 색을 묶는 체계를 살펴본다.
색상환은 하나가 아니다
무지개의 색을 띠로 늘어놓으면 빨강에서 시작해 보라에서 끝난다. 그런데 보라와 빨강 사이에는 자주·마젠타처럼 무지개에 없는 색이 있고, 이 색들로 두 끝을 이으면 띠가 고리가 된다. 이것이 색상환(Color wheel)이다. 색상환은 색의 "색상"(빨강·노랑·초록 같은 색의 종류)만 골라 둥글게 늘어놓은 지도다. 뉴턴(Isaac Newton)이 『광학』(Opticks, 1704)에서 스펙트럼의 색을 원 위에 배치한 뒤로 수많은 색상환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원 위에 색을 "어떤 간격으로" 놓느냐다. 화가와 미술 교육에서 오래 써 온 색상환은 빨강·노랑·파랑(RYB)을 세 원색으로 삼아 고르게 120°씩 놓고, 그 사이를 주황·초록·보라로 채운다. 바우하우스의 교사였던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1888–1967)이 『색채의 예술』(Kunst der Farbe, 1961)에서 제시한 12색상환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이 계열을 RYB 색상환(RYB color wheel)이라고 부른다. 반면 디자인 도구의 HSL 색상환은 화면의 빨강·초록·파랑 빛을 기준으로 놓고, 3장에서 만난 OKLCH 같은 지각 색상환은 사람이 느끼는 색상 차이가 고르도록 각도를 정한다.
ART.rybToHue, 이텐식 배치를 화면 색상각에 맞춘 이 책의 약속이며 표준은 아니다)로 칠한 12색이다. 각 칸을 OKLCH 색상각 위에 옮기면(아래 점) 빨강·주황·노랑 사이에 다섯 칸이 몰리고, 초록 다음의 청록(185°)과 파랑(265°) 사이는 80° 넘게 비어 있다. RYB 색상환은 따뜻한 색을 잘게, 청록·파랑 쪽을 크게 뭉뚱그려 나눈 지도다.이 차이 때문에 "맞은편"도 달라진다. 아래 시뮬레이터의 두 원은 같은 색을 두 색상환에 동시에 표시한다. 한쪽 원 위의 손잡이를 끌면 다른 원 위의 같은 색도 따라 움직이고, 각 원의 맞은편(보색)이 함께 표시된다.
두 색상환, 두 보색
어느 쪽이 맞을까. 둘 다 틀리지 않았다. 다만 답하는 질문이 다르다. RYB 색상환은 "물감을 섞을 때 서로를 지워 회색을 만드는 짝"에 가깝게 만들어진 화가의 경험 지도다(빨강 물감과 초록 물감을 섞으면 진흙색이 된다, 4장). OKLCH 색상환은 "사람이 느끼는 색상 차이"를 고르게 나눈 지각의 지도이고, 그 맞은편은 빛의 보색과 잔상의 색에 더 가깝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맞는 지도를 고른다.
보색: 마주 보는 두 색
보색(Complementary colors)은 색상환에서 서로 마주 보는 두 색이다. 그런데 "마주 본다"를 정하는 방법이 적어도 세 가지 있다. 첫째, 두 물감을 섞으면 회색이 되는 짝(물감의 보색). 둘째, 두 빛을 더하면 흰빛이 되는 짝(빛의 보색). 셋째, 한 색을 오래 보고 난 뒤 흰 바탕에 떠오르는 잔상의 색(잔상의 보색). 셋은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괴테(J. W. von Goethe)는 『색채론』(Zur Farbenlehre, 1810)에서 눈이 한 색을 본 뒤 그 반대편 색을 "요구한다"며 잔상을 색 조화의 근거로 삼았고, 이 생각은 뒤의 많은 색채 교육에 영향을 주었다.
잔상을 직접 만들어 본다. 아래 그림의 가운데 검은 점을 시작 단추를 누른 뒤 정해진 시간 동안 눈을 떼지 말고 바라본다. 시간이 끝나면 색이 사라지고 빈 바탕만 남는다. 그때 무슨 색이 떠오르는지 본다.
잔상으로 보는 보색
색상환 위의 도형: 배색 공식
색상환이 생기자 사람들은 그 위에 도형을 그려 어울리는 색을 고르기 시작했다. 원 위에 점 두 개, 세 개, 네 개를 일정한 각도로 찍고 그 자리의 색을 함께 쓰는 방법이다. 이 장에서는 이것을 배색 공식(Color harmony schemes)이라고 부른다. 가장 흔히 쓰는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공식은 색상(각도)만 정한다. 명도와 채도는 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구마다 나머지를 채우는 방식이 다르다. 이 책의 엔진 ART.harmony는 RYB와 HSL 색상환에서는 HSL의 채도·명도를 그대로 두고, OKLCH 색상환에서는 OKLCH의 명도·채도를 그대로 둔 채 각도만 돌린다. 아래에서 기준색과 공식을 고르면 세 색상환의 결과를 나란히 보여 준다. 위쪽 띠에서 손잡이를 끌어 기준색의 색상을 바꾼다.
같은 공식, 세 색상환
세 줄의 차이에서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 같은 공식이라도 색상환에 따라 전혀 다른 색이 나온다. "삼각 배색을 썼다"는 말만으로는 어떤 색인지 알 수 없다. 둘, RYB·HSL로 돌린 결과는 명도가 제멋대로 흩어지고, OKLCH로 돌린 결과는 명도가 가지런하다. 가지런한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다음 절에서 보듯, 명도가 모두 같으면 오히려 그림이 읽히지 않는다.
공식을 끝까지 밀면
배색 공식은 출발점으로는 쓸모가 있다. 하지만 공식 그대로 쓰면 어색해지는 지점이 있다. 아래에서 기준색의 명도와 채도를 끝까지 밀어 본다. 공식이 "요구한" 색과 화면이 실제로 낼 수 있는 색을 나란히 놓고, 아래에는 같은 색들을 흑백으로 보여 준다.
공식이 무너지는 자리
여기서 본 한계는 셋이다. 첫째, 색상환은 원이지만 실제 색의 범위는 원통이 아니다. 노랑은 밝을 때만, 파랑은 어두울 때만 선명할 수 있어서 "같은 명도, 같은 채도, 다른 색상"이라는 공식의 약속은 자주 지킬 수 없다(3장의 색역). 둘째, 공식은 명도를 정하지 않는다. 명도가 비슷한 색끼리는 흑백으로 보면 하나로 뭉쳐 형태가 읽히지 않는다(6장). 셋째, 공식은 넓이를 정하지 않는다. 보색 두 색을 반반씩 칠한 화면과, 하나를 바탕에 넓게 깔고 다른 하나를 작게 찍은 화면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색상환 밖의 체계: 오방색
색을 묶는 방법이 원 위의 각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오방색(五方色, Obangsaek)은 청·적·황·백·흑의 다섯 색을 방위(동·남·중앙·서·북)와 오행(목·화·토·금·수), 계절과 짝지은 체계다. 오방색에는 흰색과 검정이 당당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색상환에서는 가운데로 밀려나 "색이 없는" 자리인 무채색이, 오방색에서는 방위 하나씩을 맡는다. 다섯 정색 사이에서 나오는 색을 간색이라 부르는 전통도 있지만, 그 이름과 구성은 문헌에 따라 다르다.
오방색은 색동저고리, 단청, 혼례의 청홍, 조각보처럼 생활과 의례 곳곳에 쓰였다. 이것을 "보색 배색"이나 "삼각 배색"으로 설명하려 하면 잘 맞지 않는다. 오방색의 짝은 색상 각도가 아니라 우주와 방위의 질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같은 다섯 색을 두 가지 지도에 놓아 본다.
오방색: 방위의 지도와 색상의 지도
오방색은 색상환 공식이 유일한 "조화의 원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색동은 선명한 색을 띠로 나란히 놓지만 흰 바탕과 색 사이의 리듬으로 질서를 만들고, 단청은 녹청 계열의 넓은 바탕 위에 붉은 계열을 적게, 흰 선으로 경계를 또렷이 그어 명도 대비를 만든다. 여기서도 결국 앞 절의 세 가지, 명도·채도·넓이를 다루는 솜씨가 배색을 살린다. 전통 색의 의미와 문화적 맥락은 12장, 수묵의 농담은 11장에서 더 다룬다.
실제로 배색을 고르는 순서
지금까지 본 것을 실제 작업 순서로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어떤 색상환으로 생각할지 정한다. 물감을 섞어 그림을 그린다면 RYB 색상환이 손에 익은 언어이고, 화면에서 브랜드 색을 고른다면 명도를 지키는 OKLCH 색상환이 다루기 쉽다. 다음으로 공식으로 후보를 여럿 만든다. 그리고 후보마다 명도를 벌리고, 채도에 순서를 두고, 넓이를 나눠 실제 쓰일 자리(포스터, 웹 화면, 간판)에 놓아 본다. 마지막으로 흑백, 실제 조명, 실제 바탕 위에서 확인한다.
가상의 예로, 동네 빵집의 주황 간판에 보색 파랑을 같은 명도·같은 채도로 넣은 시안과, 같은 파랑을 아주 어둡게 눌러 글자색으로만 쓴 시안을 생각해 보자. 앞의 것은 두 색이 서로 밀어내며 경계가 떨리고, 뒤의 것은 주황이 주인공이 되고 파랑은 읽기 좋은 글자가 된다. 색상은 같은 "보색 배색"인데 결과는 전혀 다르다. 공식은 무엇을 쓸지 알려 주지만 어떻게 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책방 E 배색 실험실
마지막 시뮬레이터는 가상의 서점 "책방 E"의 로고 초록 #2f7d5b를 기준으로 배색 공식을 돌리고, 그 결과를 가을 행사 포스터, 웹사이트 머리, 검은 에코백에 바로 칠해 본다. 왼쪽 위 작은 색상환의 손잡이로 기준색의 색상을 바꿀 수 있다. 두 슬라이더는 공식 다음에 사람이 하는 일, 곧 명도 벌리기와 채도 조절이다. 둘 다 0과 100%에 두면 공식의 결과 그대로다. 화면 색은 기기마다 다르니 색의 관계를 본다.
책방 E 배색 실험실
ART.harmony의 결과에서 출발해 OKLCH 명도를 기준색 위아래로 번갈아 옮기고 채도에 배율을 곱한 뒤 화면 안으로 맞춘 값이다. 대비는 WCAG 2 공식.)실험실에서 보듯 공식은 출발점을 빨리 준다. 하지만 같은 공식이라도 색상환을 바꾸고, 명도를 벌리고, 채도를 조절하는 손길에 따라 전혀 다른 포스터가 된다. 마지막에 판단하는 질문은 공식이 아니라 그림과 디자인이 전하려는 이야기다. 이 판단에 필요한 도구, 명도·채도·대비·관계를 다음 부 "관계"에서 하나씩 다룬다.
서윤의 작업 노트
보색을 물었더니 두 개의 답이 돌아왔다
로고 초록 #2f7d5b의 짝이 될 색을 찾으려고 서윤은 디자인 프로그램에서 보색을 눌렀다. 자줏빛 분홍이 나왔다. 도경에게 보여 주자 도경은 손때 묻은 12색상환 카드를 꺼내 초록의 맞은편을 짚었다. 붉은 벽돌색 쪽이었다. "네 화면은 눈의 지도를 보고, 내 카드는 물감의 지도를 보는 거야. 둘 다 맞아. 무엇을 할 건지 먼저 정해."
두 사람은 이 장의 실험실에서 같은 초록을 두 색상환에 놓고 보색·분할 보색·유사색 공식을 돌렸다. 이 책의 모델로 계산하면 RYB 색상환에서 초록의 보색은 벽돌색 #7d3b2f, OKLCH 색상환에서는 자두빛 분홍 #91557c이다. 분할 보색은 RYB에서 와인 #7d2f43과 갈색 #7d4f2f, OKLCH에서 자두 보라 #7e5c94와 장미 #9b545e가 나왔다. 유사색은 RYB에서 풀색 #3e7d2f과 남청 #2f587d, OKLCH에서 올리브 #58783c와 청록 #007d7a이었다.
서윤은 이 가운데 세 묶음을 후보로 골랐다. 주인이 말한 "오래된 동네 책방"에는 도경의 벽돌색이 잘 어울렸고, "젊은 손님"에는 화면에서 고른 자두·장미 쪽이 산뜻했다. 유사색 묶음은 서점 앞 가로수길을 닮았다. 그런데 공식 결과를 포스터 시안에 그대로 칠하자 어색한 점이 바로 보였다. OKLCH 공식의 짝 색은 모두 초록과 명도가 거의 같아서(L* 44~47), 초록 바탕 위의 자두색 제목은 색상은 정반대인데도 흐릿했다. RYB의 벽돌색은 조금 더 어두웠지만(L* 33) 초록과 반반 칠하니 경계가 떨렸다. 도경은 "공식은 무슨 색을 쓸지만 알려 주지, 얼마나 밝게, 얼마나 넓게는 안 알려 줘"라고 일지에 적었다. 서윤은 그 문장 옆에 후보 셋의 값을 적었다.
| 후보 | 만든 방법 | 색 | 명도 L* |
|---|---|---|---|
| A | RYB 보색 | #2f7d5b + 벽돌 #7d3b2f | 47 · 33 |
| B | OKLCH 분할 보색 | #2f7d5b + 자두 #7e5c94 + 장미 #9b545e | 47 · 45 · 44 |
| C | OKLCH 유사색 | 올리브 #58783c + #2f7d5b + 청록 #007d7a | 47 · 47 · 47 |
#2f7d5b
A 벽돌#7d3b2f
B 자두#7e5c94
B 장미#9b545e
C 올리브#58783c
C 청록#007d7a
핵심 정리
- 색상환은 하나가 아니다. 화가의 RYB 색상환은 빨강·노랑·파랑을 고르게 놓은 경험의 지도이고, OKLCH 같은 지각 색상환은 사람이 느끼는 색상 차이를 고르게 나눈 지도다. RYB는 따뜻한 색을 잘게, 청록·파랑을 크게 나눈다.
- 보색에는 물감을 섞어 회색이 되는 짝, 빛을 더해 흰색이 되는 짝, 잔상으로 보이는 짝이 있다. 빨강의 보색은 RYB에서 초록, 지각 색상환과 잔상에서는 청록에 가깝다.
- 보색·유사색·삼각·분할 보색 공식은 색상(각도)만 정한다. 같은 공식도 어느 색상환에서 돌리느냐에 따라 결과 색이 크게 다르다.
- 공식은 명도·채도·넓이를 정해 주지 않는다. 명도가 같은 색끼리는 흑백에서 뭉치고, 밝은 노랑의 보색처럼 화면이 낼 수 없는 색을 요구하기도 한다.
- "보색은 조화롭다" 같은 공식은 교육의 관습이며 일반 법칙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다. 선호 연구는 색상이 비슷하고 명도 차이가 있는 조합을 좋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고한다.
- 오방색은 색을 각도가 아니라 방위·오행·계절로 묶은 체계로, 흰색과 검정이 정색의 자리를 차지한다. 전통 색에는 하나로 정해진 수치가 없다.
확인 퀴즈
1. 미술 시간의 색상환에서는 빨강의 보색이 초록인데, 디자인 프로그램의 지각 색상환에서는 청록에 가깝다. 가장 알맞은 설명은?
2. 빨간 원을 30초 바라본 뒤 흰 바탕을 보면 떠오르는 잔상의 색에 가장 가까운 것은?
3. OKLCH 색상환에서 밝은 노랑(명도 0.86, 채도 0.16)의 보색을 공식대로 만들었더니 연한 하늘빛 회색이 나왔다. 이유로 가장 알맞은 것은?
4. 오방색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