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9

색은 상대적이다

가게 거울 앞에서 고른 회색 니트가 집에 와서 보니 푸르스름하다. 흰 셔츠에 맨 넥타이와 검은 정장에 맨 같은 넥타이가 다른 색 같다. 우리는 색을 물건에 붙은 성질처럼 말하지만, 눈은 색을 홀로 보지 않는다. 언제나 둘레의 색, 조명에 대한 짐작과 함께 본다. 이 장은 화가 요제프 알베르스가 학생들에게 시킨 실험을 따라, 한 색을 두 색으로 만들고 두 색을 한 색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원리로 로고 색 하나가 놓일 자리마다 흔들리는 문제를 고친다.

색은 속인다

1장에서 같은 회색 칸이 검은 바탕에서는 밝게, 흰 바탕에서는 어둡게 보이는 것을 봤다. 8장에서는 이것을 이텐의 일곱 대비 중 하나인 동시 대비로 불렀다. 이 장은 이 현상을 한가운데에 놓는다. 먼저 그림 한 장을 본다. 왼쪽과 오른쪽의 작은 사각형, 그리고 둘을 잇는 가는 띠는 모두 같은 색이다.

두 사각형과 잇는 띠는 모두 같은 #9a8458 보라 위에서는 밝은 금빛, 노랑 위에서는 어둡고 탁한 갈색에 가깝다
그림 1. 한 색, 두 얼굴. 알베르스의 수업에서 가장 먼저 하는 연습을 흉내 낸 그림이다. 짙은 보라 바탕은 가운데 색을 더 밝고 노랗게, 밝은 노랑 바탕은 더 어둡고 푸르스름하게 민다. 가는 띠를 손가락으로 가리고 보면 두 사각형이 다른 색처럼 보이고, 띠를 따라 눈을 옮기면 색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 1888–1976)는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배우고 가르친 뒤 1933년 미국으로 건너가 블랙마운틴 칼리지와 예일 대학교에서 색을 가르친 화가다. 그는 색 이론을 외우게 하는 대신 학생들에게 색종이를 오려 붙이게 했고, 그 수업을 『색의 상호작용』(Interaction of Color, 1963)으로 묶었다. 이 책의 요지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색은 물리적으로 정해진 값과 우리가 실제로 보는 모습이 거의 언제나 다르고, 그 차이는 옆에 놓인 색이 만든다. 알베르스는 그래서 색을 배우는 방법은 이론이 아니라 눈으로 겪는 실험이라고 보았다. 그가 물감보다 색종이를 고집한 이유도 같다. 색종이는 같은 색을 여러 장 정확히 반복할 수 있고, 섞다가 생기는 우연이 없다.

한 색을 두 색으로

알베르스의 첫 과제는 "한 색을 두 색으로 보이게 하라"였다. 같은 색종이 두 조각을 서로 다른 바탕 두 장 위에 올려, 두 조각이 다른 색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아래에서 해 본다. 위쪽 두 칸의 가운데 사각형은 언제나 같은 색이다. 아래 색판에서 손잡이 ①과 ②를 끌어 두 바탕의 색을 고른다. 색판은 가로가 색상, 세로가 명도다.

SIMULATOR

한 색을 두 색으로

색판의 ①②를 끈다
가운데 색(두 칸 같음)—
바탕 ① · ②—
모델이 예상한 보이는 차이 ΔE—
해볼 것: ① 회색에서 ①을 색판 위쪽(밝은 바탕), ②를 아래쪽(어두운 바탕)으로 끈다. 명도 대비만으로도 두 회색이 달라진다. ② 둘 다 같은 높이(같은 명도)에 두고 ①은 주황 쪽, ②는 청록 쪽으로 옮긴다. 이번에는 회색이 각각 반대 색으로 물든다. ③ 황갈색에서 ①을 밝은 노랑, ②를 짙은 보라 근처로 옮긴다. 그림 1의 조합이다. 명도와 색상을 함께 반대로 밀면 차이가 가장 커진다. ④ "띠 보기"를 켜고 띠를 따라 눈을 옮긴다. (보이는 차이는 이 장의 단순한 대비 모형으로 계산한 대략의 값이다. 바탕이 넓고 가운데가 작을수록, 경계가 선명할수록 실제 효과가 커진다. 화면 색은 기기마다 다르다.)

두 바탕을 명도와 색상 모두 서로 반대쪽에 둘 때 가운데 색이 가장 크게 갈라진다. 밝은 바탕은 가운데를 어둡게, 어두운 바탕은 밝게 밀고, 노란 바탕은 푸르게, 보라 바탕은 노랗게 민다. 가운데 색이 회색처럼 채도가 낮을수록 이 밀림이 잘 보인다. 반대로 선명한 색은 잘 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알베르스의 연습에는 흔히 탁한 중간 톤이 가운데 색으로 쓰였다.

색종이로 한 색을 두 색으로 색종이 묶음(또는 잡지에서 오린 넓은 색면)에서 탁한 중간 톤 한 장을 고른다. 엄지손톱 크기 조각 두 개를 오리고, 바탕으로 쓸 색종이 두 장을 여러 후보 중에서 고른다. 목표는 가까이 대 보고도 "다른 색"이라고 믿을 만큼 두 조각을 갈라 놓는 것이다. 다 했으면 조각을 바탕에서 떼어 흰 종이 위에 나란히 놓아 확인한다. 이 장의 시뮬레이터보다 실제 종이에서 효과가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화면은 바탕이 작고, 둘레에 다른 색(이 책의 바탕, 손가락, 방)이 많기 때문이다.

바탕에서 밀려나는 색: 간단한 모형

이 장의 시뮬레이터는 동시대비를 아주 단순한 규칙 하나로 흉내 낸다. 가운데 색은 바탕과의 차이가 조금 더 커지는 쪽으로 보인다. 명도는 밝은 바탕에서 어둡게, 어두운 바탕에서 밝게. 색은 바탕 색의 반대 방향으로. 이것을 지각에 가깝게 만든 색 공간 OKLab에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C_{\text{보임}} = C + k\,(C - B)$$
\(C\): 가운데 색의 실제 값(OKLab의 명도 L, 두 색 축 a·b), \(B\): 바탕 색, \(k\): 밀리는 세기. 이 책은 명도에 \(k=0.15\), 색 축에 \(k=0.25\)를 쓴다. \(k\)가 0보다 크면 대비(바탕에서 멀어짐), 0보다 작으면 뒤에서 볼 동화(바탕 쪽으로 끌림)다.
대비(넓은 바탕, k > 0) 어둡다밝다 바탕 B 실제 C 보이는 색 동화(가는 무늬, k < 0) 어둡다밝다 둘레 줄 실제 C 보이는 색
그림 2. 밀리기와 끌리기. 넓은 바탕 위의 작은 색은 바탕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보이고(대비), 아주 가는 줄무늬 사이에 끼인 색은 오히려 둘레 줄 쪽으로 끌려 보인다(동화). 같은 색이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는 무늬의 크기, 경계의 모양, 보는 거리에 달려 있다.
이 모형은 장난감이다 위 식은 방향을 감으로 익히기 위한 교육용 근사이고, \(k\) 값은 이 책이 정한 것이지 실험으로 맞춘 값이 아니다. 실제 동시대비의 세기는 가운데 색의 크기와 바탕의 넓이, 경계가 선명한지 흐린지, 두 색이 맞닿았는지 떨어졌는지, 보는 시간과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색 과학에는 둘레의 영향을 더 정교하게 넣은 색 외관 모형(예: 국제조명위원회의 CIECAM02 계열)이 있지만, 그것들도 복잡한 무늬 속의 색을 완전히 예측하지는 못한다. 이 장의 숫자는 시안끼리 비교하는 데만 쓰고, 마지막 판단은 실제 재료를 실제 자리에 대 보고 눈으로 한다.

두 색을 한 색으로

알베르스의 두 번째 과제는 거꾸로다. 실제로 다른 두 색을 바탕을 골라 같은 색으로 보이게 만든다. 앞의 규칙을 뒤집어 쓰면 된다. 밝은 쪽 색은 더 밝은 바탕에 올려 어둡게 밀고, 어두운 쪽 색은 더 어두운 바탕에 올려 밝게 민다. 아래의 두 가운데 사각형 A와 B는 실제로 다른 색이다. 바탕 ①②를 끌어 둘을 같아 보이게 만들어 본다. "자동으로 찾기"는 이 장의 모형으로 가장 잘 맞는 바탕 한 쌍을 색판에서 찾는다.

SIMULATOR

두 색을 한 색으로

색판의 ①②를 끈다
실제 차이 ΔE2000(A–B)—
보이는 차이(모델)—
판정—
해볼 것: ① 처음에는 두 바탕이 같다. A와 B의 차이를 눈으로 확인한다. 같은 바탕 위에서는 대비 때문에 차이가 실제보다 조금 커 보인다. ② "자동으로 찾기"를 누른다. A(밝은 쪽)에는 더 밝고 색이 반대쪽인 바탕이, B에는 더 어두운 바탕이 골라진다. 보이는 차이가 실제 차이보다 크게 줄어든다. ③ 명도 차이를 0.16까지 올리고 다시 찾는다. 바탕을 아무리 골라도 같아 보이게 만들 수 없다. 바탕이 밀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④ 색판에서 손잡이를 일부러 반대로(A를 어두운 바탕, B를 밝은 바탕) 놓아 본다. 차이가 실제보다 커진다. (자동 찾기는 색판의 칸들을 모두 짝지어 이 장의 대비 모형으로 보이는 차이가 가장 작은 쌍을 고른다. 모형이 예상하는 "같아 보임"이 실제로도 같아 보인다는 보장은 없다.)

세 번째 해볼 것이 중요하다. 동시대비는 강력하지만 무한하지 않다. 이 장의 모형으로 계산하면 명도에서 바탕이 밀 수 있는 양은 바탕과 가운데의 차이의 15% 정도라서, 두 색의 실제 차이가 크면 흰 바탕과 검은 바탕을 써도 메울 수 없다. 실무로 옮기면 이렇다. 인쇄소에서 받은 견본이 화면 색과 조금 다를 때 바탕을 바꿔 "같아 보이게" 만들 수는 있지만, 크게 다르면 바탕으로 덮을 수 없다. 색 자체를 고쳐야 한다.

동화: 둘레로 물드는 색

동시대비는 색을 바탕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런데 무늬가 아주 가늘어지면 반대 일이 생긴다. 색이 둘레의 색 쪽으로 끌려가 보인다. 이것을 동화(Assimilation)라고 한다. 19세기 독일의 기상학자 빌헬름 폰 베촐트(Wilhelm von Bezold, 1837–1907)는 양탄자 무늬를 디자인하다가, 무늬의 가는 선 색 하나만 바꿔도 무늬 전체의 색이 바뀌어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동화의 대표적인 예를 베촐트 효과(Bezold effect)라고 부른다(우리말로 "베졸트"라고도 적는다). 아래에서 같은 빨강 줄 사이에 검은 줄과 흰 줄을 끼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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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줄 사이의 색

왼쪽·오른쪽 가운데 색—
멀리서 섞이면(왼쪽)—
멀리서 섞이면(오른쪽)—
해볼 것: ① 베촐트에서 줄 굵기 2~3으로 본다. 같은 빨강이 검은 줄 사이(왼쪽)에서는 어둡고 짙게, 흰 줄 사이(오른쪽)에서는 밝고 분홍빛으로 보인다. 빨강이 끼인 줄 쪽으로 끌려간다. ② 굵기를 20 이상으로 올린다. 이제는 넓은 면끼리 맞닿아, 검은 줄 옆의 빨강이 오히려 밝고 선명해 보이기도 한다. 동화가 대비로 넘어간다. ③ "화이트 착시"로 바꾼다. 회색 토막은 왼쪽에서는 검은 줄 위에, 오른쪽에서는 흰 줄 위에 놓였다. 많은 사람에게 왼쪽 회색이 더 밝아 보인다. 경계를 더 길게 맞댄 위아래 줄 쪽으로 끌린 셈이다. (아래의 "멀리서 섞이면" 칸은 줄과 가운데 색을 넓이만큼 빛으로 평균한 색이다. 화면을 멀리서 보거나 실눈을 뜨면 이 색에 가까워진다. 화면의 화소 배열과 확대 배율에 따라 가는 줄이 흐려지거나 무늬가 생길 수 있다.)

동화가 왜 생기는지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가장 쉬운 설명은 눈의 해상도다. 줄이 아주 가늘면 눈이 이웃한 줄의 빛을 조금씩 섞어 받아들여서, 1장의 점묘처럼 병치 혼합에 가까워진다. 시뮬레이터 아래의 "멀리서 섞이면" 칸이 그 방향을 보여 준다. 하지만 마이클 화이트(Michael White)가 1979년에 보고한 화이트 착시(White's illusion)는 줄이 꽤 굵어도 남아 있어서, 무늬를 어떻게 "묶어서" 보는지(회색 토막이 어느 줄에 속한다고 보는지)를 함께 따지는 설명들이 경쟁하고 있다.

화가와 디자이너에게 동화는 쓸모가 많다. 직물과 자수에서는 가는 실 한 가닥의 색을 바꿔 넓은 면의 색을 바꾼다. 그래픽에서는 가는 검은 선으로 감싼 색이 더 짙고 무겁게, 흰 선으로 감싼 색이 더 가볍게 보인다. 글자에서도 일어난다. 가는 글자는 둘레 바탕의 색을 머금어, 같은 색이라도 굵은 제목보다 연하고 흐리게 보인다. 로고나 브랜드 색을 가는 선이나 작은 글자로 쓸 때 색이 "약해 보이는" 이유다.

색 항상성: 조명을 빼고 보는 눈

지금까지는 둘레의 색이 가운데 색을 바꿨다. 그런데 눈은 둘레에서 조명도 읽어 낸다. 해 질 녘 빛이 주황빛이어도 흰 종이를 희게, 초록 잎을 초록으로 본다. 이렇게 조명이 바뀌어도 물체의 색을 비슷하게 느끼는 능력을 색 항상성(Color constancy)이라고 한다. 눈과 뇌는 장면 전체를 보고 "지금 빛이 이렇구나"를 짐작한 뒤 그만큼을 빼고 물체의 색을 정한다. 1장의 첫 시뮬레이터에서 카메라와 눈이 다르게 본 이유다.

색 항상성은 밝기에서도 일어난다. 아래 그림의 A칸과 B칸은 화면에서 정확히 같은 회색이다.

두 띠는 같은 색 A의 색B의 색
그림 3. 그림자 속의 밝은 칸. 그림자 밖의 어두운 칸 A와 그림자 안의 밝은 칸 B는 화면에서 같은 회색(#6c6c6c)이다. 눈은 B가 그림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림자만큼을 빼서 "원래 밝은 칸"으로 본다. 에드워드 애덜슨(Edward Adelson)이 1995년에 발표한 "바둑판 그림자 착시"의 원리를 이 책이 다시 그린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두 띠는 A와 B의 색을 떼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착시라고 부르지만, 사실 눈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 눈의 목적은 화면에 나온 빛의 양을 재는 것이 아니라 물체의 성질(이 칸은 밝은 타일이다)을 알아내는 것이다. 아래 시뮬레이터는 서점 진열대를 전구색에서 낮빛까지 여러 조명 아래에서 낮빛 고정 카메라로 찍은 장면이다. 장면 전체를 보면 따뜻한 빛 아래서도 초록 간판은 초록, 흰 카드는 흰 카드로 읽힌다. "구멍으로 보기"를 켜면 장면을 회색 종이로 가리고 작은 구멍 하나로만 본다. 구멍을 끌어 여러 물건 위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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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을 가리면 사라지는 항상성

구멍을 끈다
구멍 아래 물건—
화면에 나온 색(카메라)—
순응한 눈이 짐작한 색—
두 색의 차이 ΔE—
해볼 것: ① 2,700 K에서 장면 전체를 본다. 화면은 주황빛이지만 초록 간판, 흰 카드, 파란 책이 어느 정도 제 색으로 읽힌다. ② "구멍으로 보기"를 켜고 구멍을 초록 간판 위에 둔다. 둘레가 가려지자 같은 화면 색이 올리브나 황갈색에 가깝게 보인다. 흰 카드 위에 두면 연한 살구색이다. ③ 색온도를 1,800 K까지 내린다. 장면 전체를 봐도 색이 많이 무너진다. 항상성에도 한계가 있다. ④ 6,500 K 근처에서는 구멍을 켜도 끄도 거의 같다. (장면의 물건 색은 이 책의 교육용 분광 모형으로 계산했다. 광원은 흑체 복사, 반사율은 색에서 거꾸로 추정한 매끈한 곡선, "순응한 눈"은 브래드퍼드 색순응이다. 실제 눈의 순응은 완전하지 않아서 진짜 장면에서도 따뜻한 기운이 조금 남아 보인다.)

구멍으로 보면 항상성이 사라지는 것은, 눈이 조명을 짐작할 단서를 잃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실눈을 뜨거나 종이에 구멍을 뚫어 색을 확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면 전체를 보면 "초록 간판"이라는 지식이 화면에 실제로 나온 색을 덮어 버린다. 그림에 칠해야 하는 것은 대개 "알고 있는 색"이 아니라 그 자리에 실제로 와 닿는 색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림자를 파랗게, 햇빛 받은 흰 벽을 노랗게 칠한 것도 이 차이에 눈을 뜬 결과로 볼 수 있다(10장).

드레스는 무슨 색이었나 2015년 2월, 줄무늬 드레스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서 크게 퍼졌다. 어떤 사람에게는 흰색과 금색, 어떤 사람에게는 파랑과 검정으로 보였다. 실제 드레스는 파랑과 검정이었다. 이 사진은 조명을 짐작할 단서가 아주 모호했다. 그림자 속의 푸른 빛으로 해석한 사람은 푸른 기운을 빼고 흰색·금색을, 따뜻한 실내 빛으로 해석한 사람은 노란 기운을 빼고 파랑·검정을 봤다고 설명된다. 라퍼-소사(Lafer-Sousa), 허먼, 콘웨이의 2015년 연구(Current Biology)는 많은 참가자를 조사해 이렇게 의견이 갈리는 현상을 확인하고, 사람마다 조명에 대한 기본 가정이 다를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색 항상성은 "옳은 답을 내는 장치"가 아니라 "가장 그럴듯한 조명을 추측하는 과정"이고, 추측이 갈리면 색도 갈린다.

투명해 보이는 종이

알베르스의 연습 중 가장 마법 같은 것은 투명 착시(Illusion of transparency)다. 불투명한 색종이 세 장을 퍼즐처럼 맞붙여 놓았을 뿐인데, 두 장의 반투명한 종이가 겹쳐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비결은 가운데 조각(겹친 곳)의 색을 두 색 "사이"의 그럴듯한 값으로 고르는 것이다. 셀로판처럼 빛을 거르는 재료라면 겹친 곳은 두 색보다 어둡고, 얇은 천이나 안개처럼 빛을 흩는 재료라면 두 색의 중간이 된다. 이탈리아의 심리학자 파비오 메텔리(Fabio Metelli)는 1970년대에 이런 조건을 수식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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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조각으로 만드는 투명

명도 L*: 노랑 · 겹침 · 파랑—
겹친 조각—
모델 판정—
해볼 것: ① 셀로판에서 그대로 본다. 노랑과 파랑 종이가 겹쳐 짙은 초록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세 조각 떼어 보기"를 켜면 사실은 세 장의 불투명한 색일 뿐이다. ② "어느 쪽이 위에 있나"를 0이나 1 쪽으로 민다. 얇은 천에서 특히 잘 보인다. 겹친 색이 한쪽 색에 가까워지면 그 색 종이가 위에 덮인 것처럼 보인다. ③ 어긋남을 0.5 이상으로 올린다. 겹친 곳의 색이 두 색과 상관없는 색이 되자 투명함이 사라지고, 세 번째 색 조각이 끼워진 퍼즐로 보인다. (판정은 이 장이 정한 단순한 규칙이다. 셀로판은 겹친 곳이 두 색보다 어둡고 색상이 두 색 사이에 있을 때, 얇은 천은 명도가 두 색 사이에 있고 OKLab에서 두 색을 잇는 선 가까이 있을 때 "투명해 보이기 쉽다"고 본다.)

한국의 모시 조각보는 이 착시의 실물판이라 할 만하다. 얇은 모시 조각을 이어 붙인 보자기를 창에 걸면, 솔기에서 천이 두 겹으로 겹친 자리가 더 짙은 선으로 드러나고, 서로 다른 색 조각이 겹친 곳에는 두 색 사이의 색이 생긴다. 여기서는 착시가 아니라 진짜 투명이지만, 눈이 "겹침"을 읽는 규칙은 같다. 겹친 곳이 두 색과 그럴듯한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투명을 본다.

불투명한 색종이로 투명 만들기 색종이 묶음에서 서로 다른 두 색(예: 연노랑과 하늘색)을 고르고, 겹친 곳에 놓을 세 번째 색을 여러 후보 중에서 찾는다. 두 색종이를 직사각형으로 오려 한 귀퉁이가 겹치도록 놓고, 겹치는 자리만큼 오린 세 번째 색을 그 위에 붙인다. 셀로판처럼 보이게 하려면 두 색보다 조금 어두운 색, 얇은 천처럼 보이게 하려면 두 색의 중간 색이 잘 맞는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각의 색을 일부러 엉뚱한 색으로 바꿔 투명함이 깨지는 순간을 확인한다.

그림과 디자인에서

알베르스 자신은 이 원리를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Homage to the Square) 연작에서 수십 년 동안 탐구했다.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 서너 개를 한가운데에서 조금 아래로 치우치게 포갠 단순한 틀을 정해 두고, 색만 바꿔 가며 같은 색이 어떤 바탕 안에서 앞으로 나오고 뒤로 물러나는지, 테두리가 빛나거나 가라앉는지를 실험했다. 같은 틀을 고정했기 때문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 오직 색의 관계라는 점이 드러난다(이 작품들은 저작권이 남아 있어 이 책에 싣지 않는다).

화가에게 상대성은 작업 방식을 바꾼다. 색은 팔레트 위가 아니라 그림 위에서 판단해야 한다. 흰 팔레트 위에서 "딱 맞는 피부색"으로 섞은 물감이, 짙은 배경을 칠한 캔버스 위에서는 너무 밝고 차갑게 보이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많은 화가가 바탕을 먼저 중간 톤으로 칠해 두고 시작한다. 흰 바탕은 모든 색을 실제보다 어둡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수채화처럼 흰 종이를 쓸 수밖에 없는 그림은 반대로, 다 칠한 뒤에야 처음 칠한 색이 생각보다 밝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디자이너에게 상대성은 "같은 색 값을 썼는데 왜 달라 보이느냐"는 질문으로 찾아온다. 웹 화면의 회색 글자가 파란 카드 위에서는 노르스름하게, 주황 카드 위에서는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어두운 화면 모드에서 밝은 화면 모드와 같은 강조색을 쓰면 더 밝고 들떠 보인다. 브랜드 색을 여러 매체에 쓰는 회사들이 바탕별로 색 값을 따로 정해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견본은 실제 바탕 위에서 고른다 색을 오래 다룬 사람들은 색 견본을 흰 책상 위에서 고르지 않는다. 포스터라면 붙일 벽의 색 위에서, 간판이라면 간판 재료 위에서, 웹이라면 실제 페이지의 배경색 위에서 본다. 회의 자료에 넣을 때도 견본을 흰 바탕과 실제 바탕에 함께 놓은 판을 만든다. 알베르스식으로 한 걸음 더 가면, 견본을 볼 때 그 둘레를 중간 회색 종이로 가려 바탕의 영향을 지운 모습도 함께 본다. 세 모습(흰 바탕, 실제 바탕, 회색 가림)이 크게 다르면 그 색은 놓일 자리마다 흔들릴 색이다.

로고 초록의 바탕별 변형

이 장의 도구를 한데 모아 실제 문제 하나를 푼다. 책방 E의 로고 초록 후보 #2f7d5b는 세 자리에 놓인다. 크라프트지 간판, 흰 바탕 웹사이트, 검은 에코백. 기준은 "중간 회색 위에서 본 #2f7d5b의 모습"으로 정한다. 어느 바탕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의 모습이다. 각 바탕에서 보이는 색이 이 기준에서 얼마나 벗어나는지(ΔE)를 보고, 밝은 바탕(흰 웹·크라프트지)용과 어두운 바탕(검은 에코백)용 변형 두 개로 그 흔들림을 줄인다. 동시에 로고가 바탕에서 읽히는지(WCAG 대비비)도 본다.

결과는 직관과 반대다. 흔히 어두운 바탕에는 더 밝은 색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같아 보이게"가 목표라면 어두운 바탕용은 오히려 조금 어둡게 가야 한다. 어두운 바탕이 이미 색을 밝게 밀어 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흰 바탕은 색을 어둡게 밀므로 밝은 바탕용은 조금 밝게 간다. 다만 이 보정은 읽힘과 부딪힌다. 어두운 바탕용을 너무 어둡게 하면 로고가 바탕에 묻힌다. 그래서 바탕별 변형은 "같아 보이게"와 "잘 읽히게" 사이에서 정하는 선택이고, 그 선택의 근거를 숫자와 함께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하다.

바탕별 로고 시트 브랜드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들은 로고 색을 하나의 값으로 넘기지 않고, 바탕별 사용 규칙을 한 장의 시트로 만든다. 밝은 바탕용, 어두운 바탕용, 사진 위, 한 가지 색만 쓸 수 있는 경우(도장, 각인)의 값을 나란히 두고, 각각을 실제 재료에 찍은 사진을 붙인다. 숫자만 있는 시트는 언젠가 누군가 화면에서 다시 고르게 만들고, 사진만 있는 시트는 재현할 수 없다. 둘을 함께 둔다. 시트에는 "이 값은 어느 바탕 위에서 정했는가"를 꼭 적는다. 이 장에서 본 대로, 바탕이 빠진 색 값은 절반만 적힌 정보다.

서윤의 작업 노트

CASE 서윤작업 노트 · 9장

같은 초록이 세 자리에서 세 번 흔들렸다

포스터를 정리한 다음 주, 서윤은 로고 시안을 세 자리에 대 보았다. 크라프트지 간판 견본(이 책에서는 #c8a77c로 적는다), 흰 바탕 웹 시안(#ffffff), 검은 에코백 천(#1d1d1f). 같은 #2f7d5b인데 웹에서는 무겁고 어둡게, 에코백에서는 밝고 들떠 보였다. 간판 견본 위에서는 조금 푸르스름했다. 주인은 "로고가 매번 다른 집 것 같다"고 했다.

도경은 색 일지에서 알베르스식 연습 한 장을 꺼냈다. 같은 색종이 조각을 흰 종이와 검은 종이 위에 올려 둔 낡은 페이지였다. "색 하나를 정하려고 하지 말고, 자리마다 어떻게 보일지를 정해. 그리고 기준을 하나 세워." 두 사람은 기준을 "중간 회색 종이 위에서 본 #2f7d5b"로 정했다. 서윤이 이 장의 모형으로 계산하니 원래 값의 흔들림은 흰 웹 ΔE 6.7, 크라프트지 3.8, 검은 에코백 5.8이었고, 바탕과의 대비비는 각각 4.99, 2.21, 3.37이었다. 도경은 숫자보다 회색 종이에 구멍을 뚫어 견본을 대 보는 쪽을 믿었지만, 두 방법이 흔들림의 순서를 같게 가리킨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서윤은 변형 두 개를 만들었다. 밝은 바탕용은 흰 웹과 크라프트지에 함께 쓰고, 두 곳의 흔들림 중 큰 쪽을 가장 작게 하되 흰 바탕 대비 4.5 이상을 지키게 했다. 어두운 바탕용은 검은 에코백의 흔들림을 가장 작게 하되 검정 대비 3.0 이상을 지키게 했다. 대비 하한이 없으면 어두운 바탕용은 #18704f까지 내려가 흔들림이 거의 0이 되지만 대비가 2.77로 떨어진다. 서윤은 읽힘을 택했다.

변형값(OKLCH)쓰는 곳흔들림 ΔE대비비
원래 후보#2f7d5b (0.532 / 0.094 / 162°)흰 웹 · 크라프트 · 검정6.7 · 3.8 · 5.84.99 · 2.21 · 3.37
밝은 바탕용#268662 (0.555 / 0.104 / 164°)흰 웹 · 크라프트지3.3 · 3.24.51 · 1.99
어두운 바탕용#287554 (0.505 / 0.092 / 162°)검은 에코백2.23.01
이 장에서 정한 것로고 초록은 하나의 값이 아니라 기준 하나와 바탕별 변형 둘로 적는다. 기준: 중간 회색 위 #2f7d5b. 밝은 바탕용 #268662(흰 웹·크라프트지, 흰 바탕 대비 4.5 이상), 어두운 바탕용 #287554(검은 바탕, 대비 3.0 이상). 어두운 바탕용을 더 밝게 하지 않고 조금 어둡게 둔 것은 "같아 보이게"를 위한 서윤의 선택이며, 값마다 정한 바탕과 대비 하한을 함께 적는다. 모든 값은 이 책의 단순 모형으로 계산한 것이라 실물 견본으로 다시 확인한다.
아직 남은 문제크라프트지 간판 위 대비가 2.0 안팎으로 낮아 로고 모양이 약하다. 간판은 서점 전구 아래에 걸리는데, 이 계산은 낮빛 기준이다. 웹사이트에 올릴 서점 사진도 전구 빛 때문에 주황으로 기운다.
다음 단계10장: 전구 빛과 해 질 녘 빛 아래의 색, 사진의 화이트밸런스, 수채화 「해 질 녘 서점 앞」의 그림자 색을 계획한다.

핵심 정리

  1. 색은 홀로 보이지 않는다. 같은 색이 바탕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한 색을 두 색으로), 다른 두 색이 같게 보이기도 한다(두 색을 한 색으로). 알베르스는 이것을 색종이 실험으로 가르쳤다.
  2. 넓은 바탕 위의 작은 색은 바탕과 반대쪽으로 밀려 보인다(동시대비). 밝은 바탕은 어둡게, 어두운 바탕은 밝게, 색이 있는 바탕은 그 보색 쪽으로 민다. 채도가 낮은 색일수록 잘 밀린다.
  3. 바탕이 미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 차이가 큰 두 색은 바탕을 바꿔도 같아 보이게 만들 수 없다.
  4. 무늬가 가늘면 색이 오히려 둘레 쪽으로 끌려 보인다(동화, 베촐트 효과). 가는 선과 작은 글자의 색은 둘레 색을 머금는다.
  5. 눈은 장면에서 조명을 짐작해 빼고 본다(색 항상성). 둘레를 가리면 항상성이 사라지고, 조명 단서가 모호하면 사람마다 다른 색을 본다.
  6. 겹친 곳의 색이 두 색과 그럴듯한 관계일 때 불투명한 색면도 투명하게 보인다. 색 값은 놓일 바탕과 함께 적고, 여러 바탕에 쓰는 색은 바탕별 변형을 정한다.

확인 퀴즈

1. 실제로는 A가 B보다 조금 밝은 두 회색 조각을 같은 색처럼 보이게 하려 한다. 바탕을 어떻게 고르는 것이 맞는가?

밝은 바탕은 가운데 색을 어둡게, 어두운 바탕은 밝게 민다. 밝은 쪽 A를 밝은 바탕에 두면 어둡게, 어두운 쪽 B를 어두운 바탕에 두면 밝게 보여 차이가 줄어든다. 첫 번째 보기는 차이를 오히려 키우고, 같은 바탕은 차이를 그대로 남긴다.

2. 빨간 무늬에 아주 가는 검은 선을 촘촘히 넣었더니 빨강 전체가 더 짙고 어두워 보였다. 이 현상에 가장 가까운 것은?

가는 줄 사이의 색이 둘레 줄 쪽으로 끌려 보이는 것이 동화다. 동시대비라면 검정 옆의 빨강은 오히려 밝아 보여야 한다(넓은 면에서 실제로 그렇다). 조명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메타메리즘과 무관하다.

3. 전구색 조명 아래 서점에서 찍은 사진의 흰 카드 부분만 작은 구멍으로 보니 연한 살구색이었다. 그런데 사진 전체를 보면 카드가 희게 보인다. 가장 알맞은 설명은?

화면에 나온 색은 살구색이 맞지만, 장면 전체에서 조명 단서를 읽은 눈은 그 기운을 빼고 "흰 카드"로 판단한다. 구멍으로 둘레를 가리면 단서가 없어 화면 색 그대로 보인다. 카드가 실제로 흰지는 조명 아래의 반사율 문제이지 착각의 문제가 아니다.

4. 중간 회색 위에서 본 로고 초록을 기준으로, 검은 에코백 위에서도 "같아 보이게" 하려 한다. 이 장의 대비 모형을 따를 때 어떻게 고쳐야 하며, 무엇과 부딪히는가?

어두운 바탕은 가운데 색을 밝게 민다. 같아 보이게 하려면 그만큼 미리 어둡게 둬야 한다. 하지만 어두운 바탕 위의 어두운 색은 대비비가 낮아진다. 그래서 대비 하한(예: 3:1)을 정해 그 안에서 최대한 맞춘다. 무채색 바탕도 명도로 동시대비를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