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6

명도가 먼저다

휴대폰 사진에 흑백 필터를 씌워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진은 흑백이 되자 오히려 단단해지고, 어떤 사진은 회색 안개처럼 풀어져 무엇을 찍었는지조차 흐려진다. 색은 그대로 빠졌는데 왜 결과가 이렇게 다를까. 남은 것은 밝고 어두움, 곧 명도뿐이다. 이 장은 그 명도가 그림과 디자인의 뼈대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다. 색을 고르기 전에 명도를 먼저 정하라는 화가들의 오랜 요령이 왜 맞는지, 그리고 언제 깨도 되는지도 함께 본다.

흑백으로 바꾸면 보이는 것

색을 말할 때 우리는 보통 "빨강", "초록"처럼 색의 종류부터 말한다. 그런데 색에는 세 가지 성질이 겹쳐 있다. 어떤 계열인가(색상(Hue)), 얼마나 선명한가(채도(Chroma), 7장), 그리고 얼마나 밝은가. 이 마지막 성질이 명도(Value, Lightness)다. 명도는 그 색을 같은 밝기의 회색으로 바꿨을 때 그 회색이 얼마나 밝은지로 생각하면 된다. 이 책은 명도를 CIELAB의 L*로 적는다. 0이 완전한 검정, 100이 흰색이다.

세 성질 중 흑백 사진에 살아남는 것은 명도 하나다. 그리고 명도는 색상을 따라 저절로 정해지지 않는다. 아래 그림은 화면이 낼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여덟 색(순색)을 명도 눈금 위에 놓은 것이다.

파랑 32 빨강 53 주황 67 노랑 97 보라 41 자홍 60 청록 91 초록 88 0102030405060708090100 명도 L* (CIELAB) · 먼셀 명도로는 대략 이 값의 10분의 1 점선: 그 순색을 흑백으로 바꾸면 놓이는 자리
그림 1. 순색의 명도는 제각각이다. 화면의 가장 선명한 노랑(#ffff00)은 L* 97로 흰색 바로 옆에, 가장 선명한 파랑(#0000ff)은 L* 32로 짙은 회색 자리에 놓인다. 둘 다 "가장 선명한 색"이지만 흑백으로는 거의 반대편이다. 이 책의 모델로 계산한 값이다. 색상환에서 가까운 색이라도 명도는 멀 수 있고, 먼 색이라도 명도는 같을 수 있다.

그러면 글자와 그림이 "읽힌다"는 것은 색상 차이와 명도 차이 중 어느 쪽에 더 달려 있을까. 아래에서 직접 비교한다. 오른쪽 판은 제목 글자색의 지도다. 가로로 가면 바탕과 색상이 멀어지고(0°는 같은 계열, 180°는 정반대 계열), 세로로 가면 바탕보다 밝아지거나 어두워진다. 손잡이를 끌어 글자색을 고르고, 왼쪽 견본에서 얼마나 잘 읽히는지 본다. 그다음 오른쪽 위 흑백 단추를 눌러 지도 전체를 명도만으로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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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 차이와 명도 차이, 어느 쪽이 읽히게 하나

판 위의 손잡이를 끈다
명도 차이 ΔL*—
색 차이 ΔE2000—
WCAG 대비—
해볼 것: ① 손잡이를 가운데 높이(ΔL* 0) 오른쪽 끝으로 끈다. 바탕과 정반대 계열이라 색 차이 ΔE는 50을 넘는데, 글자의 경계가 떨리며 잘 안 읽힌다. ② 손잡이를 맨 왼쪽(같은 계열)으로 옮기고 위아래로 끈다. 색상은 그대로인데 명도 차이가 30을 넘으면 또렷이 읽힌다. ③ "흑백"을 켠다. 지도가 가로줄 무늬가 된다. 가로 방향(색상 차이)은 흑백에서 사라지고 세로 방향(명도 차이)만 남는다. 대비 기준선도 정확히 수평이다. WCAG 대비는 두 색의 휘도만으로 계산하므로 색상을 전혀 보지 않는다. (글자색은 OKLCH 채도 0.13을 목표로 하고, 화면 밖이면 채도를 줄였다. 명도는 CIELAB L*로 맞췄다.)

가로로 멀리 가도, 곧 색상이 정반대여도 명도가 같으면 글자는 잘 읽히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계열의 색끼리도 명도만 충분히 다르면 또렷하다. 이것이 이 장의 제목이 말하는 바다. 형태와 글자를 드러내는 일은 대부분 명도가 하고, 색상은 그 위에 성격과 분위기를 얹는다. 명도가 같은 두 색이 맞닿은 상태를 등휘도(Equiluminance)라고 부른다. 등휘도의 경계는 흐릿하게 떨리거나 어른거려 보이기 쉽다.

왜 명도가 먼저인가

명도가 이렇게 큰 힘을 갖는 이유는 눈과 뇌가 정보를 나눠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 1장에서 본 것처럼 눈은 빛을 대략 "밝기", "빨강–초록", "노랑–파랑"의 세 신호로 바꾼다. 이 중 밝기 신호는 가장 세밀하다. 가는 선, 작은 글자, 물체의 가장자리처럼 촘촘한 무늬는 주로 밝기 신호로 전달되고, 두 색 신호는 훨씬 성긴 해상도로만 따라온다.

시각 과학자 캐슬린 멀런(Kathy T. Mullen)은 1985년 논문에서, 밝기만 다른 줄무늬와 색만 다른(밝기는 같은) 줄무늬를 놓고 사람이 얼마나 가는 무늬까지 알아보는지 쟀다. 색 줄무늬는 무늬가 촘촘해지면 밝기 줄무늬보다 훨씬 일찍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신경생물학자 마거릿 리빙스턴(Margaret Livingstone)은 『시각과 미술』(Vision and Art: The Biology of Seeing, 2002)에서 이런 연구들을 바탕으로, 형태·깊이·움직임을 읽는 처리 경로가 주로 명도 차이에 반응한다는 해석으로 많은 회화를 설명했다. 이 해석이 모든 작품에 들어맞는지는 미술사가와 과학자 사이에 논쟁이 있지만, "명도가 형태를 나른다"는 화가들의 경험칙과 잘 맞는다.

색만으로 그린 그림이 떠 보이는 이유 리빙스턴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에서 주황 해가 둘레의 회청색 하늘과 명도가 거의 같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색으로는 해가 가장 눈에 띄는데, 명도로는 하늘에 녹아 있다. 그래서 해가 하늘에 붙어 있지 않고 어른거리는 듯한 인상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같은 이유로, 명도가 같은 빨강 글자와 초록 바탕은 경계가 진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화가에게 등휘도는 피해야 할 실수이기도 하고, 아지랑이·빛·안개처럼 경계가 녹아야 하는 장면에서 일부러 쓰는 도구이기도 하다. 다만 이 그림의 실제 명도 측정값은 사진과 복원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고되므로, 여기서는 원리의 예로만 든다.

명도를 숫자로 적는 방법은 두 단계다. 먼저 화면 값(감마가 걸린 숫자)을 빛의 세기로 되돌려 사람의 눈이 느끼는 비중대로 더해 휘도(Luminance) Y를 구한다. 초록이 가장 큰 몫을, 파랑이 가장 작은 몫을 차지한다. 그다음 Y를 사람이 느끼는 밝기의 간격에 맞게 휘어 L*로 바꾼다.

$$Y = 0.2126\,R_{\text{lin}} + 0.7152\,G_{\text{lin}} + 0.0722\,B_{\text{lin}},\qquad L^* = 116\,\sqrt[3]{Y/Y_n} - 16$$
\(R_{\text{lin}}, G_{\text{lin}}, B_{\text{lin}}\): 화면 값을 선형광으로 되돌린 값(0~1), \(Y_n\): 흰색의 휘도(=1). 아주 어두운 영역(\(Y/Y_n\)가 약 0.009 이하)에서는 세제곱근 대신 직선 식을 쓴다(CIE 15:2004). 휘도가 18% 정도인 회색이 L* 약 50, 곧 "중간 밝기"로 보인다. 빛이 반만 남아도 눈에는 반보다 훨씬 밝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 책의 시뮬레이터 머리마다 붙은 흑백 단추가 바로 이 Y만 남긴다. 그래서 흑백으로 본 회색은 원래 색과 L*가 같다.

"흑백 변환"은 도구마다 다르다 사진 앱과 그래픽 프로그램의 흑백 기능이 모두 이 공식을 쓰지는 않는다. 어떤 "채도 없애기" 기능은 HSL의 명도, 곧 빨강·초록·파랑 값 중 최댓값과 최솟값의 평균을 쓴다. 이 방식으로는 순수한 노랑과 파랑이 둘 다 같은 회색(50%)이 된다. 그림 1에서 본 것처럼 실제로는 L* 97과 32로 크게 다른데도 말이다. 어떤 필터는 일부러 색마다 다른 비중을 주어 하늘을 어둡게 하는 식의 "표현"을 한다. 명도 구조를 점검할 때는 휘도에 맞춘 방식(이 책의 흑백 단추, 또는 도구의 "휘도·Luminosity" 기준)을 쓰고, 어떤 방식인지 모르면 회색 견본 몇 개로 먼저 시험한다.

명도 단계표

화가들이 명도를 익히는 첫 연습은 명도 단계표(Value scale)다. 흰색에서 검정까지를 고른 간격의 칸으로 나눠 칠하는 것이다. 미국의 화가이자 교육자 앨버트 먼셀(Albert H. Munsell)은 20세기 초에 만든 색 체계에서 명도를 0(검정)부터 10(흰색)까지 눈으로 고른 간격의 단계로 나눴고, 이 열한 단계는 지금도 미술 수업의 기본 눈금으로 쓰인다. 먼셀 명도는 대략 L*의 10분의 1이다.

눈으로 고른 간격을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흰 물감에 검정을 조금씩 더하면 될 것 같지만, 아래 시뮬레이터로 해 보면 그렇지 않다. 검정을 같은 비율 간격(0%, 12.5%, 25%, …)으로 섞어 단계표를 만든 뒤, "명도를 같은 간격으로"로 바꿔 필요한 비율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본다. "물을 타는 먹·수채"로 바꾸면 흰 물감 대신 종이의 흰색을 쓰는 투명한 재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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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 단계표 만들기: 같은 비율과 같은 명도

가운데 칸—
이웃 칸 명도 차이—
해볼 것: ① "비율을 같은 간격으로"에서 첫 두 칸을 본다. 검정 12.5%만 넣어도 명도가 96에서 37까지 떨어지고, 뒤쪽 칸들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② "명도를 같은 간격으로"로 바꾼다. 중간 밝기(L* 50 근처)를 내는 데 검정이 5% 남짓이면 된다. 밝은 쪽 칸일수록 검정을 아주 조금씩 더해야 한다. ③ "먹·수채 + 물"로 바꾼다. 투명한 재료는 먹의 양에 따라 명도가 덜 급하게 변하지만, 여전히 고른 간격은 아니다. 단계 수를 11까지 올려 이웃 칸의 차이가 2~3보다 작아지는 곳을 찾는다. 그 정도면 종이 위에서는 구별이 어렵다. (불투명은 이 책 엔진의 쿠벨카–뭉크 혼합으로 티타늄 화이트와 아이보리 블랙을 섞은 교육용 근사, 투명은 "종이 반사율 × 10^(−2 × 흡광도)"에 흡광도가 먹의 농도에 비례한다는 비어–람베르트 근사다. 실제 물감과 먹은 제품·종이·붓질에 따라 다르다.)

검정 물감은 빛을 흡수하는 힘이 워낙 세서, 아주 조금만 섞여도 흰 물감이 돌려보내던 빛을 크게 줄인다. 게다가 눈은 밝은 쪽의 작은 변화에 더 민감하다(앞의 L* 공식이 세제곱근으로 휘는 이유다). 두 효과가 겹쳐 "같은 양씩 더하기"는 밝은 쪽에서 성큼성큼, 어두운 쪽에서 찔끔찔끔 변하는 계단을 만든다. 그래서 단계표는 비율이 아니라 눈으로, 또는 명도 숫자로 맞춘다.

연필로 9단계 명도표 만들기 2 cm 칸 아홉 개를 가로로 그린다. 맨 왼쪽은 종이의 흰색 그대로 두고, 맨 오른쪽은 4B 이상의 연필로 가장 짙게 칠한다. 다음에 한가운데(5번) 칸을 "흰색과 검정의 딱 중간"이라고 느껴지게 칠하고, 그 사이를 다시 반씩 나눠 3번, 7번, 마지막으로 나머지를 채운다. 끝에서부터 차례로 칠하는 것보다 가운데부터 나눠 가는 편이 간격이 고르다. 다 칠하면 한 걸음 물러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웃한 두 칸이 붙어 보이는 곳을 고친다. 만든 단계표에 구멍을 뚫어 두면 다음 절부터 풍경이나 사진의 한 점이 몇 번 칸에 해당하는지 대어 볼 수 있다.

노탄: 명도를 덩어리로 보기

단계표가 명도의 "눈금"이라면, 그 눈금으로 화면 전체를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눠 보는 일이 노탄(Notan, 濃淡)이다. 일본어로 "짙음과 옅음"을 뜻하는 말로, 미국의 미술 교육자 아서 웨슬리 다우(Arthur Wesley Dow)가 1899년 책 『구성』(Composition)에서 동아시아 그림과 판화의 명암 배치를 서양 미술 교육에 소개하며 이 말을 썼다. 노탄은 세부를 모두 지우고 화면을 두세 가지 명도의 모양으로만 본다. 그렇게 남은 큰 배치를 명도 구조(Value structure)라고 한다.

① 밝은 바탕 · 어두운 주인공 ② 어두운 바탕 · 밝은 주인공 ③ 중간 바탕 · 밝음과 어둠의 강조 ④ 모두 중간 · 구조가 무너짐
그림 2. 세 가지 명도로 짠 네 가지 명도 구조. 같은 장면(벽, 탁자, 그 위의 상자)을 밝음·중간·어둠의 배치만 바꿔 그렸다. ①은 실루엣처럼 또렷하고, ②는 어둠 속에서 주인공이 빛난다. ③은 넓은 중간 바탕 위에서 가장 밝은 것과 가장 어두운 것을 맞붙여 초점을 만든다. ④는 모든 면이 L* 55~65 사이에 몰려, 흑백으로 보면 상자가 어디 있는지 찾기 어렵다. 어느 구조가 옳은 것은 아니다. ④도 안개 낀 아침처럼 일부러 경계를 녹이는 장면에서는 쓸모가 있다.

명도 구조를 말할 때 자주 쓰는 말이 하나 더 있다. 화면 전체가 밝은 쪽 단계에 몰려 있으면 하이 키(High key), 어두운 쪽에 몰려 있으면 로 키(Low key)라고 한다. 하이 키는 가볍고 공기 같은 인상을, 로 키는 무겁고 극적인 인상을 주기 쉽다. 명도 범위를 일부러 좁게 쓰는 것도 선택이다. 어둠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의 그림이 좋은 예다.

렘브란트의 호메로스 흉상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 어두운 배경 속에서 검은 모자와 넓은 흰 소매 옷을 입은 수염 난 남자가 오른손을 하얀 대리석 흉상의 머리에 얹고 있다. 금목걸이가 어깨에서 허리로 늘어져 있고, 빛은 얼굴과 소매와 흉상에만 떨어진다.
그림 3. 렘브란트 판 레인, 「호메로스 흉상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 1653. 화면의 대부분이 짙은 갈색과 검정이고, 밝은 곳은 얼굴, 흰 소매, 흉상, 금목걸이 몇 군데뿐이다. "흑백" 단추를 눌러 보면 이 그림이 색보다 명도로 짜여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진다. 밝은 덩어리들이 흉상의 머리에서 철학자의 얼굴로, 다시 목걸이를 따라 손으로 이어지며 시선을 이끈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Purchase, special contributions and funds given or bequeathed by friends of the Museum, 1961), 캔버스에 유채. 공공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소장처 작품 페이지 · 크레딧

이제 작품을 노탄으로 바꿔 본다. 아래 시뮬레이터는 그림의 모든 점을 명도에 따라 몇 개의 단계로 나눠, 각 단계를 회색 하나로 칠한다. 아래 띠는 그림 전체의 명도 분포(히스토그램)이고, 띠 위의 손잡이가 단계를 나누는 경계다. 손잡이를 좌우로 끌어 경계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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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탄: 작품을 2·3·5단계로

아래 띠의 경계 손잡이를 끈다
경계 L*—
단계별 넓이(어둠 → 밝음)—
평균 명도 · 키—
해볼 것: ① 렘브란트를 3단계, 같은 명도 간격으로 본다. 화면의 98%가 어둠 단계이고 밝음 단계(L* 67 이상)는 0%다. 이 사진에서 가장 밝은 소매조차 L* 50 남짓이다. 렘브란트는 명도 범위의 아래쪽 절반만으로 빛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로 키다. ② 단계 수를 2로 내리고 경계 손잡이를 끌어 L* 10~25 사이를 오간다. 얼굴·소매·흉상이 한 덩어리로 이어지는 경계를 찾는다. 이것이 이 그림의 노탄이다. ③ "같은 넓이"로 바꾸면 각 단계가 화면을 똑같이 나눠 갖도록 경계가 옮겨 간다. 구조가 오히려 흐려지는 것을 본다. 명도 구조는 넓이를 고르게 나누는 일이 아니다. ④ 조선 산수로 바꾼다. 그림 전체가 L* 25~53의 좁은 범위 안에 있다. 2단계로 두고 경계를 38~42 사이에서 움직이면 먹으로 그린 부분과 비단 바탕이 갈린다(6절에서 다시 본다). (명도는 사진 파일의 sRGB 값에서 계산한 L*다. 작품 사진은 조명·촬영·화면에 따라 원작과 다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2단계로 줄여도 무엇이 그려졌는지 알아볼 수 있다. 화가들이 "명도가 맞으면 색은 거의 아무것이나 된다"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큰 명도 구조가 서 있으면 색은 그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반대로 명도 구조가 무너진 그림은 색을 아무리 고쳐도 흐릿하다. 다만 "같은 넓이"에서 본 것처럼, 단계를 기계적으로 고르게 나누는 것은 구조가 아니다. 구조는 어디를 밝게 남기고 어디를 어둠으로 묶을지를 정하는 일이다.

눈을 가늘게 뜨는 점검

화실에서 가장 흔히 보는 동작 중 하나가 그림 앞에서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면 들어오는 빛이 줄고 초점이 흐려져, 작은 세부와 색의 미묘한 차이는 사라지고 큰 명도 덩어리만 남는다. 노탄을 머릿속에서 즉석으로 만드는 셈이다. 아래는 그 효과를 흉내 낸 것이다. 경계선을 좌우로 끌어 원본과 흐린 모습을 비교하고, 흐림 정도를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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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늘게 뜨면 남는 것

원본의 명도 대비(L* 표준편차)—
흐린 뒤 남은 명도 대비—
해볼 것: ① "포스터 시안 1"을 흐린다. 붉은 제목은 여전히 붉은 얼룩으로 보이지만, "흑백"을 함께 켜면 제목 자리가 바탕에 녹아 사라진다. 흐린 뒤 남은 명도 대비도 크게 줄어든다. ② "포스터 고친 안"으로 바꾼다. 같은 정도로 흐려도 밝은 제목 덩어리가 그대로 남는다. ③ 렘브란트를 최대로 흐린다. 얼굴과 소매와 흉상, 밝은 세 덩어리가 끝까지 남는다. 좋은 명도 구조는 흐려도 읽힌다. (흐림은 선형광에서 평균한 상자 흐림 두 번이다. 실제로 눈을 가늘게 뜨면 빛도 줄어들어 어두운 쪽 차이가 더 먼저 사라진다.)

흐림 점검은 세부를 그리기 전, 그리고 다 그린 뒤에 두 번 하면 좋다. 세부를 그리기 전에는 큰 덩어리가 서 있는지, 다 그린 뒤에는 세부가 큰 덩어리를 깨뜨리지 않았는지 본다. 디자이너가 작업 화면을 한껏 축소해 엄지손톱만 하게 보거나, 몇 걸음 떨어져 모니터를 보는 것도 같은 점검이다.

우표만 한 명도 스케치부터 많은 화가가 큰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우표나 명함만 한 작은 칸에 연필이나 회색 마커 두세 자루로 명도 스케치(썸네일)를 여러 장 그린다. 작게 그리면 세부를 그릴 수가 없어서 저절로 덩어리만 생각하게 된다. 같은 장면을 밝은 바탕 안, 어두운 바탕 안, 중간 바탕 안으로 각각 그려 보고 가장 또렷한 것을 고른다. 이 단계에서는 색을 쓰지 않는 것이 요령이다. 색을 쓰기 시작하면 "예쁜 색"에 마음이 끌려 명도 구조가 흔들린다. 한도경의 말로는 "색은 명도 스케치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고른다".

수묵의 농담: 명도만으로 그린 그림

명도만으로 그림을 짓는 일을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다듬은 전통 중 하나가 동아시아의 수묵화다. 수묵화는 먹과 물, 그리고 종이나 비단의 바탕색만으로 그린다. 먹을 진하게 또는 묽게 쓰는 정도를 농담(濃淡, Ink tonality)이라고 하고, 앞 절의 노탄이라는 말도 같은 한자에서 왔다.

당나라의 장언원(張彥遠)은 9세기에 쓴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서 먹을 잘 운용하면 다섯 가지 색이 다 갖추어진다는 뜻의 말을 남겼고, 이 생각은 뒤에 "먹에는 다섯 빛깔이 있다(墨分五色)"는 말로 널리 전해졌다. 다섯 가지를 무엇으로 꼽는지는 책과 시대마다 다르다. 흔히 짙은 쪽부터 초(焦)·농(濃)·중(重)·담(淡)·청(淸)으로 소개하지만, 마른 먹과 젖은 먹, 바탕의 흰색을 함께 넣어 "여섯 채색"으로 꼽는 설명도 있다. 이 분류는 측정값이 아니라 전통적인 설명이다. 다만 그 핵심, 곧 먹 하나로도 몇 단계의 명도를 계획해 쓰면 색이 하는 일을 상당 부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장에서 본 원리와 정확히 같다.

조선 시대의 세로로 긴 수묵 산수화. 위쪽 오른편에 한자로 쓴 제시가 있고, 그 아래 왼쪽에 옅은 먹으로 겹겹의 먼 산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는 넓은 물과 모래톱이 비어 있고, 아래쪽에는 짙은 먹으로 그린 소나무와 바위, 작은 배와 집들이 있다.
그림 4. 작가 미상, 「평사낙안(平沙落雁,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조선 15세기 말~16세기 초. 비단에 먹으로 그린 족자로, 중국 소상강 일대의 여덟 경치를 그리는 "소상팔경" 가운데 한 장면이다. 아래쪽 소나무와 바위는 가장 짙은 먹으로, 가운데 섬은 중간 먹으로, 위쪽 먼 산은 옅은 먹으로 그렸고, 물과 하늘은 비단 바탕을 그대로 남겼다. 가장 짙은 먹은 아래쪽 가까운 경치에만 쓰였고, 먼 산은 그보다 한 단계 옅은 먹에서 멈춘다. 명도의 단계가 곧 거리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Purchase, Harris Brisbane Dick Fund, John M. Crawford Jr. Bequest, and The Vincent Astor Foundation Gift, 1992), 족자, 비단에 먹. 공공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표구 부분을 잘라 내고 그림 부분만 실었다. 소장처 작품 페이지 · 크레딧

이 관찰을 숫자로 확인한다. 아래 시뮬레이터는 그림을 가로 띠 여러 개로 나눠, 띠마다 가장 짙은 먹의 명도와 바탕(비단)의 명도를 오른쪽 그래프에 그린다. 그림 위의 띠를 위아래로 끌어 한 구간을 자세히 본다. "먹만 보기"를 켜면 누렇게 바랜 비단의 색을 빼고 먹의 농담만 흰 바탕 위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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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짙은 먹은 가까운 곳에

그림 위의 띠를 위아래로 끈다
띠 안 가장 짙은 먹 L*—
띠 안 바탕 L*—
농담의 폭 ΔL*—
해볼 것: ① 띠를 맨 아래 소나무 쪽에 둔다. 가장 짙은 먹이 L* 24~27로 그림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바탕과의 차이(농담의 폭)도 13 안팎으로 크다. ② 띠를 천천히 올려 먼 산(위에서 4분의 1~3분의 1쯤)으로 옮긴다. 산등성이를 짙게 그었는데도 가장 짙은 먹은 L* 31~34에서 멈춘다. 화가는 가장 짙은 먹을 가까운 경치에 아껴 두었다. ③ 가운데 물과 모래톱 구간에 띠를 대면 농담의 폭이 5~10으로 줄어든다. 비워 둔 비단, 곧 여백이다. ④ 맨 위 제시(글씨) 부분은 폭이 6 안팎이다. 글씨의 먹도 세월에 바랬다. 그래프가 깔끔한 한 줄로 좁아지지 않는 것도 실제 작품의 모습이다. 측정은 원리를 확인하는 도구이지 그림을 설명하는 공식이 아니다. (사진 파일에서 잰 값이다. 500년 넘게 된 비단은 누렇게 바랬고 먹도 일부 옅어졌으므로, 그린 당시의 명도와는 다르다. 가장 짙은 먹은 띠 안 어두운 쪽 3%, 바탕은 밝은 쪽 30%의 명도로 정했다.)

멀리 있는 것일수록 명도 대비가 줄고 바탕색에 가까워지는 현상은 실제 풍경에서도 일어난다. 공기 속의 물방울과 먼지가 빛을 흩뜨려, 먼 산과 눈 사이에 옅은 빛의 막이 끼기 때문이다. 서양 회화에서는 이것을 대기 원근(Aerial perspective)이라고 부르고, 동아시아 산수화는 이것을 먹의 농담과 여백으로 그렸다. 하나는 색으로, 하나는 먹으로 접근했지만 둘 다 결국 명도 대비의 크기로 거리를 만든다.

먹 한 가지로 세 단계 풍경 먹물(또는 검정 수채 물감)과 물, 접시 세 개를 준비한다. 첫 접시에는 먹을 그대로, 둘째에는 물을 같은 양만큼, 셋째에는 물을 훨씬 많이 타서 짙음·중간·옅음을 만든다. 먼저 종이 귀퉁이에 세 농도를 칠해 서로 충분히 다른지 확인한다(앞의 시뮬레이터에서 보았듯 물의 양과 명도는 비례하지 않으므로 눈으로 맞춘다). 그다음 엽서만 한 종이에 먼 산은 옅은 먹으로, 중간의 언덕은 중간 먹으로, 가까운 나무나 바위는 짙은 먹으로 그린다. 하늘과 물은 종이를 그대로 남긴다. 다 그리면 순서를 바꿔, 먼 산을 가장 짙게 그린 두 번째 그림과 나란히 놓는다. 어느 쪽이 더 깊어 보이는지, 두 번째 그림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적는다.

같은 명도의 함정: 포스터 고치기

이제 디자인으로 돌아온다. 가상의 동네 서점 "책방 E"의 가을 행사 포스터 첫 시안이다. 바탕은 서점의 로고 초록 후보, 제목은 가을다운 붉은 계열로 칠했다. 색상환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색이라 화면에서는 눈에 확 띈다. 그런데 오른쪽의 흑백 판을 보면 제목이 사라진다. 두 색의 명도가 같기 때문이다.

오른쪽 끝의 명도 막대에서 "제목"과 "바탕" 손잡이를 위아래로 끌어 두 색의 명도를 바꿔 본다. 색상과 채도는 그대로 두고 명도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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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E 가을 행사 포스터: 명도만 고치기

명도 막대의 손잡이를 끈다
제목 · 바탕—
명도 차이 ΔL*—
WCAG 대비—
색 차이 ΔE2000—
해볼 것: ① 시안 1에서 수치를 본다. 색 차이 ΔE는 54로 아주 크지만 WCAG 대비는 1.00, 명도 차이는 0이다. 흑백 판에서 제목이 사라진다. ② "제목" 손잡이를 위로 끌어 L* 85 이상으로 올린다. 붉은 제목이 살구빛 크림으로 바뀌며 흑백에서도 또렷해진다. 색은 여전히 붉은 계열이다. ③ 반대로 "바탕"을 L* 90 근처로 올리고 제목을 L* 40 아래로 내린다(밝은 바탕). 이번에는 바탕이 연한 민트가 되고 붉은 제목이 진하게 선다. ④ 두 손잡이를 같은 높이로 다시 모아 본다. 어느 높이에서든 같은 높이면 흑백 판의 제목이 사라진다. (색상·채도는 OKLCH에서 고정하고 명도만 CIELAB L*에 맞췄다. 화면 밖의 색이 되면 채도를 줄였다. 화면 색은 기기마다 다르니 수치와 흑백 판을 함께 본다.)

시안 1이 실패한 이유는 색을 "무슨 색"으로만 골랐기 때문이다. 초록의 반대편이니 붉은 계열을 쓰면 눈에 띌 것이라는 생각은 색상만 본 판단이다. 화면에서 이 포스터가 그럭저럭 읽혔던 것도, 등휘도의 경계가 떨리며 오히려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쪽에 가까웠다. 게다가 색 신호가 약하게 전달되는 사람, 곧 적록 색각이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두 색이 거의 같은 색으로 보인다(13장). 흑백 점검은 이런 위험을 한 번에 걸러 내는 가장 값싼 방법이다.

디자이너의 흑백 점검 포스터, 표지, 발표 자료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은 작업 중간에 화면을 흑백으로 바꿔 보는 단축키나 보정 레이어를 하나 만들어 둔다. 휘도 기준으로 채도를 없애는 조정 레이어를 맨 위에 두고 켰다 끄는 식이다. 확인할 것은 세 가지다. 제목이 바탕에서 떨어지는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가장 밝거나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가, 같은 위계의 요소들이 비슷한 명도로 묶여 있는가. 인쇄물이라면 흑백 레이저 프린터로 한 장 뽑아 벽에 붙이고 몇 걸음 떨어져 보는 것도 좋다. 흑백 복사기로 다시 복사될 행사 안내문이라면 이 점검은 선택이 아니다.

명도 구조 설계하기

마지막 시뮬레이터는 이 장의 도구를 모아 그림 한 장의 명도 구조를 직접 짠다. 장면은 서윤이 그리려는 수채화 「창가의 책」이다. 창, 벽, 탁자, 쌓인 책, 책의 그림자, 찻잔, 여섯 부분을 밝음·중간·어둠 세 단계 중 하나로 정한다. 그림 속 부분을 누르면 단계가 차례로 바뀐다. 슬라이더는 세 단계의 명도 자체를 정한다. 각 부분의 색상과 채도는 그대로 두고, 명도만 그 단계의 값으로 맞춘다.

SIMULATOR

「창가의 책」 명도 구조 설계기

부분을 누르면 단계가 바뀐다
단계별 넓이(밝음 · 중간 · 어둠)—
책과 둘레의 명도 차이—
가장 가까운 두 단계의 차이—
해볼 것: ① "역광"에서 시작한다. 밝은 창을 등진 책과 그림자가 어둠으로 묶여 실루엣처럼 선다. 넓이는 중간이 가장 크고, 밝음과 어둠이 작게 맞붙는 곳(창과 책 사이)에 시선이 간다. ② "어둠 속 책"으로 바꾼다. 같은 장면이 어두운 방에서 책만 빛나는 그림이 된다. 렘브란트의 구조다. ③ 슬라이더 셋을 서로 가깝게 모은다. 가장 가까운 두 단계의 차이가 10 아래로 내려가면 오른쪽 노탄 판에서 부분들이 녹아 붙는다. "모두 중간"은 단계를 아예 하나로 만든 극단이다. ④ 그림 속 찻잔을 눌러 밝음↔어둠으로 바꿔 본다. 작은 부분 하나의 단계가 시선이 머무는 자리를 바꾼다. (색상과 채도는 장면마다 정해 둔 OKLCH 값이고, 명도는 CIELAB L*로 맞췄다. 같은 단계 안의 책 세 권은 구별되도록 L*를 ±4씩 달리했다.)

세 단계로 짠 구조가 서면, 그다음은 각 단계 안에서 색을 고르는 일이다. 중간 단계의 벽을 따뜻한 회색으로 할지 탁한 초록으로 할지는 명도 구조를 해치지 않는 한 자유롭다. 반대로 단계의 경계를 넘는 색, 예를 들어 어둠 단계의 책 하나를 아주 밝은 노랑으로 칠하면 구조 전체가 흔들린다. 색의 선명함이 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7장에서, 여러 대비를 한꺼번에 쓸 때의 문제는 8장에서 다룬다.

명도가 먼저라는 원칙에도 예외는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일부 그림, 앞에서 본 등휘도의 해돋이, 동아시아 채색화의 어떤 화면은 명도 차이를 일부러 줄이고 색상과 채도의 차이로 화면을 짠다. 그런 그림이 흐릿하지 않고 빛나 보인다면, 그것은 명도 구조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서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원칙을 먼저 익히는 이유는 언제 내려놓을지를 고르기 위해서다.

서윤의 작업 노트

CASE 서윤작업 노트 · 6장

흑백으로 바꾸자 제목이 사라졌다

10월 둘째 주, 서윤은 "책방 E" 가을 행사 포스터의 첫 시안을 들고 서점에 갔다. 바탕은 로고 초록 후보 #2f7d5b, 제목 "가을 책 산책"은 단풍을 떠올리며 고른 붉은 계열 #c14637이었다. 주인은 "색이 가을답네요" 하며 흑백 복사기로 동네 게시판용 안내문을 한 장 뽑았다. 종이에서 제목이 사라져 있었다.

이 책의 모델로 계산하면 두 색의 명도는 L* 47.0으로 같고, WCAG 대비는 1.00이다. 색 차이(ΔE2000)는 약 54로 아주 큰데도 그렇다. 서윤은 회사에서 버튼 색을 고를 때는 늘 대비를 쟀으면서 포스터에서는 "보색이니 눈에 띄겠지" 하고 넘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도경은 복사본을 보더니 연필로 포스터를 엽서만 하게 다시 그렸다. 칠한 것은 회색 셋뿐이었다. "제목을 먼저 밝음으로 빼고, 바탕은 중간, 책 그림을 어둠으로 묶어. 색은 그다음이야."

서윤은 제목의 색상(붉은 계열)은 지키고 명도만 올려 살구빛 크림 #ffe2d7(L* 92, OKLCH 0.93 / 0.035 / 43°)로 바꿨다. 바탕과의 대비는 4.07이 되었다. 책 그림과 테두리는 짙은 초록 #22342a(L* 20)로 묶었다. 흑백 복사본에서도 제목이 먼저, 책 그림이 그다음으로 읽혔다. 같은 날 저녁, 서윤은 「창가의 책」의 명도 스케치를 세 장 그렸다. 밝은 창을 등진 역광, 어두운 방에 책만 빛나는 구도, 그리고 모두 중간인 구도. 셋째 장은 한눈에 흐렸다. 서윤은 첫째 장을 골랐다. 도경은 대신 수채화에서는 흰 물감이 아니라 종이 자체가 가장 밝은 단계라는 점을 짚었다. "창은 처음부터 칠하지 않고 남겨 둬야 해. 수묵화가 하늘을 비워 두는 것처럼." 서윤은 도경에게 휴대폰 카메라의 흑백 모드를 켜는 법을 알려 주었고, 도경은 그날부터 스케치를 찍어 흑백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밝음 · 제목#ffe2d7 L*92 중간 · 바탕#2f7d5b L*47 어둠 · 책 그림#22342a L*20 시안 1의 제목(버림)#c14637 L*47
이 장에서 정한 것포스터의 명도 구조 세 단계: 밝음(L* 약 92, 제목·정보 글자), 중간(L* 47, 초록 바탕), 어둠(L* 약 20, 책 그림·테두리). 「창가의 책」은 역광 구조(창 L* 약 90은 종이를 남기고, 벽·탁자 약 58, 책·그림자 약 26)로 간다. 색을 고르기 전에 매번 흑백으로 확인한다.
아직 남은 문제명도는 섰는데 포스터와 「비 오는 골목」 스케치의 색이 모두 선명해서 시끄럽다. 작은 정보 글자의 대비(4.07)는 본문 글자 기준으로 충분한가.
다음 단계7장: 채도를 조절해 바탕을 누르고 주인공 색을 살린다.

핵심 정리

  1. 색은 색상·채도·명도의 세 성질을 갖고, 흑백에는 명도만 남는다. 순색도 명도가 제각각이라 노랑(L* 97)과 파랑(L* 32)은 흑백으로 거의 반대편이다.
  2. 글자와 형태가 읽히는 데는 명도 차이가 먼저 일한다. 색상이 정반대여도 명도가 같으면(등휘도) 경계가 떨리고 흑백에서는 사라진다. WCAG 대비도 명도(휘도)만 본다.
  3. 명도 단계표는 비율이 아니라 눈이나 명도 숫자로 맞춘다. 흰 물감에 검정을 같은 비율로 더하면 밝은 쪽에서 급하게 어두워진다.
  4. 노탄은 화면을 두세 가지 명도 덩어리로 보는 방법이다. 명도 구조는 단계를 고르게 나누는 일이 아니라 어디를 밝게 남기고 어디를 어둠으로 묶을지 정하는 일이다.
  5. 눈을 가늘게 뜨거나 화면을 흐리게 하면 세부와 색은 사라지고 명도 구조만 남는다. 좋은 구조는 흐려도 읽힌다.
  6. 수묵화는 먹의 농담과 바탕만으로 공간을 만든다. 먼 것일수록 명도 대비를 줄이는 원리는 대기 원근과 같다. 먹의 다섯 단계 같은 분류는 전통적인 설명이다.

확인 퀴즈

1. 초록 바탕(#2f7d5b)에 붉은 제목(#c14637)을 올린 포스터를 흑백으로 복사했더니 제목이 사라졌다. 두 색의 색 차이 ΔE2000은 약 54로 크다. 가장 알맞은 설명은?

두 색은 L* 47.0으로 같아서 흑백(휘도만 남기기)에서는 같은 회색이 된다. ΔE2000은 색상·채도 차이까지 합친 값이라, 크더라도 명도 차이가 0일 수 있다. 보색끼리 섞으면 회색 쪽으로 가는 것은 물감이나 빛을 섞을 때의 이야기이고, 나란히 놓인 두 색이 서로를 지우지는 않는다.

2. 렘브란트의 그림을 같은 명도 간격 3단계로 나눴더니 화면의 98%가 어둠 단계였고, 밝음 단계는 거의 없었다. 이런 명도 구성을 부르는 말은?

화면 전체가 어두운 쪽 단계에 몰린 구성을 로 키라고 한다. 하이 키는 그 반대(밝은 쪽에 몰림)다. 등휘도는 맞닿은 두 색의 명도가 같은 상태, 대기 원근은 먼 것일수록 대비가 줄고 바탕색에 가까워지는 현상으로, 둘 다 화면 전체의 명도 분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3. 흰 물감에 검정 물감을 0%, 12.5%, 25%, …, 100%로 같은 비율 간격씩 섞어 9칸 명도표를 만들었다. 결과로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검정은 빛을 흡수하는 힘이 커서 조금만 섞여도 명도를 크게 떨어뜨린다. 이 책의 모델로 계산하면 검정 12.5%만으로 L*가 96에서 40 아래로 내려간다. 그래서 단계표는 비율이 아니라 눈이나 명도 숫자로 맞춘다. 실제 물감에 따라 회색이 조금 푸르거나 누럴 수는 있지만 명도표로 못 쓸 정도는 아니다.

4. 조선 시대 수묵 산수화에서 가까운 소나무는 짙은 먹으로, 먼 산은 옅은 먹으로 그렸고, 먼 산을 그린 가장 짙은 먹도 가까운 바위의 짙은 먹보다 옅다. 이 표현의 원리로 가장 알맞은 것은?

실제 풍경에서도 먼 것은 공기 속 입자가 흩뜨린 빛 때문에 대비가 줄고 바탕(하늘) 쪽으로 밝아진다. 수묵화는 이것을 먹의 농담과 여백으로 그렸다. 세월에 따른 변색은 화면 전체에 일어나므로 위쪽만 골라 바래게 하지 않는다. 먹의 다섯 단계는 전통적인 설명일 뿐, 어디에 무엇을 쓸지 정한 규칙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