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색
신호등의 빨강과 초록이 비슷한 색으로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길을 건널까. 대부분은 위치(빨강은 위나 왼쪽)와 밝기로 구분한다. 그런데 웹사이트의 "품절" 표시가 제목 옆의 작은 빨간 점 하나뿐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구분할 방법이 남지 않는다. 이 장은 다른 눈으로 화면을 보는 법, 글자가 읽히는지 숫자로 재는 법, 그리고 색이 하던 일을 글자와 모양에게도 나눠 맡기는 법을 다룬다.
- 색각이상의 종류(제1·2·3색각이상, 전색각)와 대략의 비율을 설명하고, 시뮬레이션의 한계를 안다.
- WCAG 2의 대비비를 계산하고, 본문 글자 4.5:1, 큰 글자 3:1, 비텍스트 요소 3:1 기준을 적용한다.
- APCA가 무엇이며 왜 아직 참고용인지 안다.
- 색에만 의존하는 정보 표현(WCAG 1.4.1)을 찾아내고 글자·모양·위치·패턴을 함께 쓰도록 고친다.
- 색각이상 시뮬레이션과 색차로 팔레트의 구분도를 점검한다.
모두가 같은 색을 보지는 않는다
1장에서 본 것처럼 사람의 눈에는 빛에 반응하는 원뿔세포가 세 종류(L, M, S) 있다. 이 가운데 한 종류가 없거나 감도가 옮겨져 있으면 색을 구분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것을 색각이상(Color vision deficiency)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색맹", "색약"이라고 불렀지만, 색을 전혀 못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부분은 특정한 색 쌍의 구분이 어려운 정도라서 지금은 색각이상이라는 말을 쓴다.
- 제1색각이상(Protan): L 원뿔세포(긴 파장)에 문제가 있다. 빨강과 초록의 구분이 어렵고, 빨강이 어둡게 보인다.
- 제2색각이상(Deutan): M 원뿔세포(중간 파장)에 문제가 있다. 빨강과 초록의 구분이 어렵다. 색각이상 가운데 가장 흔하다.
- 제3색각이상(Tritan): S 원뿔세포(짧은 파장)에 문제가 있다. 파랑과 초록, 노랑과 분홍의 구분이 어렵다. 매우 드물다.
- 전색각(Achromatopsia): 색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밝기로만 본다. 극히 드물다.
제1·2색각이상을 묶은 적록 색각이상은 X 염색체를 따라 유전되기 때문에 남성에게 훨씬 많다. 여러 조사를 종합하면 북유럽계 남성의 약 8%, 여성의 약 0.5%가 적록 색각이상이고, 동아시아 남성에서는 대략 4~6%로 그보다 낮게 보고된다. 조사마다 방법과 대상이 달라 숫자는 대략의 값이지만, 남성 스무 명 가운데 한 명꼴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웹사이트 방문자가 하루 수백 명인 서점이라면 매일 그런 손님이 온다는 뜻이다. 여기에 나이가 들며 수정체가 누레지는 변화, 저시력, 눈부신 햇빛 아래의 휴대폰 화면처럼 색 구분이 어려워지는 상황까지 더하면 "모두가 같은 색을 본다"는 가정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다른 눈으로 화면 보기
색각이상이 없는 사람이 그 경험을 짐작해 보는 도구가 색각이상 시뮬레이션(CVD simulation)이다. 이 책의 엔진은 마샤두, 올리베이라, 페르난데스(Machado, Oliveira & Fernandes, 2009)가 원뿔세포의 감도 변화를 바탕으로 만든 모형을 쓴다. 이 모형은 "심도"를 바꿔 이상 3색각(약한 쪽)부터 2색각(강한 쪽)까지 흉내 낼 수 있다. 이 책은 논문의 심도 1.0 행렬을 쓰고, 중간 심도는 원래 색과 선형 보간한 근사로 보여 준다.
아래는 책방 E 웹사이트의 첫 화면을 단순하게 그린 것이다. 경계선을 좌우로 끌어 원래 화면(왼쪽)과 시뮬레이션(오른쪽)을 비교하고, 위의 단추로 종류를, 슬라이더로 심도를 바꾼다. 책 제목 옆의 점은 예약 가능(초록)과 품절(빨강)을 뜻한다.
책방 E 웹사이트, 다른 눈으로
시뮬레이션에서 본 두 가지 문제는 성격이 다르다. 상태 점은 색상으로만 정보를 전하고 있어서 적록 색각이상에게 사라졌다. 버튼은 색상과 상관없이 명도 대비가 낮아서 누구에게나 읽기 어렵다. 앞의 문제는 정보를 색 말고도 실어 나르면 풀리고, 뒤의 문제는 대비를 재고 기준을 맞추면 풀린다. 이 장의 나머지는 이 두 갈래를 차례로 다룬다.
명도 대비를 숫자로 재기
글자가 읽히는지는 글자와 바탕의 밝기 차이에 가장 크게 달려 있다. 웹 접근성 국제 기준인 WCAG(Web Content Accessibility Guidelines)는 W3C가 만든 지침으로, 두 색의 상대 휘도(Relative luminance)를 구해 그 비율로 대비를 잰다. 상대 휘도는 화면 값을 빛의 세기로 되돌린 뒤 초록에 가장 큰 무게를 두어 더한 값으로, 검정이 0, 흰색이 1이다.
ART.contrast()로 계산한다.대비를 직접 재 본다. 아래 색 판은 가로가 색상, 세로가 명도(OKLCH L)이고, 슬라이더로 채도를 정한다. 판 위의 두 손잡이 중 글은 글자색, 바는 바탕색이다. 끌어서 옮기면 오른쪽(또는 아래)의 미리보기와 대비 값이 바뀐다.
대비 측정기: 글자색과 바탕색 끌기
#2f7d5b 위 흰 글자는 이 책의 모델로 4.99, 본문 기준(4.5)을 넘는다. 바 손잡이를 위로 조금만 올려도 기준 아래로 떨어진다. ② "노랑/흰색"을 고른다. 노랑 글자는 아주 선명해도 1.1 남짓이다. 채도는 대비를 만들지 않는다. ③ "빨강/초록"을 고르고 시뮬레이터 머리의 흑백 단추를 누른다. 색상으로는 정반대인 두 색이 거의 같은 회색이 된다. 대비비도 1 가까이다. 명도를 끝까지 벌려야 비로소 읽힌다. (대비비는 WCAG 2 공식, APCA는 0.0.98G-4g 상수로 계산한 참고값이다. 색 판은 sRGB 색역 안으로 채도를 줄여 칠했다.)"빨강/초록"이 보여 주듯, 색상환에서 멀리 떨어진 두 색도 명도가 같으면 대비는 거의 없다. 대비비는 색상과 채도를 모르고 오직 밝기만 본다. 그래서 대비를 맞춘 화면은 흑백으로 바꿔도, 색각이상의 눈으로 봐도 글자가 남는다. 6장의 "명도가 먼저다"는 접근성에서도 그대로 성립한다.
기준표: 무엇에 몇 대 1인가
WCAG 2(현재 판은 2023년의 2.2)는 색과 관련해 네 가지 성공 기준을 둔다. 한국에도 이를 바탕으로 한 국가 표준인 한국형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이 있고, 공공기관 웹사이트는 이를 지켜야 한다.
| 기준 | 등급 | 요구 |
|---|---|---|
| 1.4.1 색의 사용 | A | 정보를 전하거나, 동작을 알리거나, 반응을 요청하거나, 요소를 구분할 때 색을 유일한 시각적 수단으로 쓰지 않는다. |
| 1.4.3 대비(최소) | AA | 글자와 글자 이미지는 대비 4.5:1 이상. 큰 글자는 3:1 이상. 장식, 비활성 요소, 로고의 글자는 예외. |
| 1.4.6 대비(강화) | AAA | 글자 7:1, 큰 글자 4.5:1 이상. |
| 1.4.11 비텍스트 대비 | AA | 버튼·입력칸의 경계, 체크 상태, 초점 표시 같은 사용자 인터페이스 요소와, 이해에 필요한 그래픽(차트의 선, 아이콘)은 인접한 색과 3:1 이상. |
"큰 글자"는 18포인트 이상, 또는 굵은 14포인트 이상을 말한다. 웹의 CSS 픽셀로는 대략 24 px 이상, 굵은 글씨는 약 18.7 px 이상이다. 글자가 크고 굵으면 획이 넓어 대비가 조금 낮아도 읽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크기와 굵기를 바꾸며 요구 기준이 어떻게 바뀌는지 본다.
글자 크기와 필요한 대비
색에만 기대지 않기
대비를 맞춰도 남는 문제가 있다. 두 상태 점처럼 명도가 비슷한 두 색으로 종류를 나누는 경우다. WCAG 1.4.1의 요구는 간단하다. 색은 써도 되지만, 색이 유일한 단서여서는 안 된다. 색이 하던 일을 함께 맡을 수 있는 통로는 여럿 있다.
차트는 색에만 기대는 일이 가장 흔한 곳이다. 아래는 책방 E의 일주일 방문자 수를 행사별로 나눈 선 차트다. 처음에는 색 견본 범례만 있다. 확인란을 하나씩 켜서 다른 통로를 더하고, 보기 단추로 제2색각이상 시뮬레이션을 켠다.
범례만 있는 차트 고치기
마지막 단계에서 차트는 색각이상이 없는 사람에게도 더 좋아졌다. 접근성을 위한 수정은 대부분 이렇다. 범례를 오가는 수고, 작은 점의 색을 맞춰 보는 수고는 누구에게나 비용이다. 접근성은 소수를 위한 "추가 기능"이 아니라 정보 디자인의 기본기에 가깝다.
구분되는 팔레트 고르기
범주가 여럿인 차트나 지도처럼 색을 여러 개 동시에 써야 할 때는 팔레트 자체를 구분되게 고른다. 이 책의 엔진은 팔레트에서 가장 비슷한 두 색의 색차(Color difference) ΔE2000을 재고, 색각이상 시뮬레이션을 거친 뒤에도 다시 잰다(ART.distinguish). 아래에서 네 가지 팔레트를 비교한다. 오카베 마사타카와 이토 가이(Okabe & Ito, 2002)가 제안한 여덟 색 팔레트는 색각이상에도 구분되도록 고른 팔레트로 널리 쓰인다.
팔레트 구분도 검사
같은 명도 6색이 무너지는 모습은 1장의 HSL 실험과 짝을 이룬다. 그때는 "같아 보여야 할 명도"가 달라서 문제였고, 이번에는 "달라 보여야 할 색"의 명도가 같아서 문제다. 범주를 구분하는 팔레트를 만들 때는 색상과 함께 명도에도 차이를 두고, 그래도 여섯 개를 넘는 범주는 색만으로 구분하려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팔레트를 실제로 짜는 일은 14장에서 이어진다.
종합: 책방 E 예약 화면 고치기
이제 이 장의 도구를 한꺼번에 쓴다. 아래는 책방 E 웹사이트의 낭독회 예약 화면이다. 처음 상태는 서윤이 처음 만든 그대로다. 연한 초록 "예약하기" 버튼, 제목 옆의 색 점 하나로 된 상태 표시, 밑줄 없는 초록 링크. 슬라이더와 확인란으로 고치면서, 아래 점검표의 네 항목이 모두 통과되게 만든다. 보기 단추로 다른 눈의 화면도 확인한다.
예약 화면 고치기: 네 가지 점검
네 항목이 모두 통과한 화면을 처음 화면과 비교해 보면, 바뀐 것은 생각보다 적다. 버튼이 조금 진해졌고, 상태에 두 글자가 붙었고, 링크에 밑줄이 생겼다. 그런데 이제 그 화면은 흑백 복사로 봐도, 햇빛 아래 휴대폰으로 봐도, 제2색각이상인 손님이 봐도 같은 정보를 전한다. 접근성 기준은 색을 빼앗는 규칙이 아니라, 색이 혼자 지던 짐을 나눠 지게 하는 규칙이다.
서윤의 작업 노트
"예약하기 버튼이 어디 있는지 한참 찾았어요"
낭독회 예약을 연 지 사흘째, 책방 E의 단골 손님 한 사람이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은 제2색각이상인데, 웹사이트의 "예약하기" 버튼을 한참 찾았고 어떤 책이 품절인지도 알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주인은 미안한 마음으로 서윤에게 메시지를 그대로 전했다.
서윤은 이 책의 엔진으로 화면을 다시 쟀다. 버튼은 연한 초록 #6fbf8f 위에 흰 글자였고, 대비가 2.20으로 본문 기준 4.5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색각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흐린 버튼이었다. 품절 표시는 책 제목 옆의 작은 빨간 점(#d64545), 예약 가능은 초록 점(#3a9a5b)이었다. 원래 눈으로는 색차 ΔE 64.7로 확연히 달랐지만, 제2색각이상 시뮬레이션에서는 6.9로 떨어져 거의 같은 황갈색이 되었다. 정보가 색 하나에만 실려 있었던 것이다(WCAG 1.4.1).
한도경은 화면을 흑백으로 바꿔 보더니 말했다. "내 제자 중에 적록 색약이 있었는데, 명도 스케치는 반에서 제일 잘했어. 그 친구는 색이 아니라 밝고 어두운 걸로 그림을 읽었거든. 네 화면도 흑백에서 읽히게 만들면 돼." 서윤은 버튼을 1장의 로고 초록 후보 #2f7d5b(흰 글자 대비 4.99)로 진하게 바꾸고, 상태 표시에 글자와 모양을 붙였다. 예약 가능은 초록 동그라미와 "예약 가능", 품절은 회색 #6b6874(흰 바탕 대비 5.44)의 빗금 친 네모와 "품절" 글자. 두 상태는 제2색각 시뮬레이션에서도 색차 13.7로 갈렸고, 무엇보다 글자가 있으니 색을 못 봐도 읽혔다. 링크에는 밑줄을 넣었다.
#6fbf8f · 2.20
새 버튼#2f7d5b · 4.99
품절(회색)#6b6874 · 5.44
#2f7d5b 위 흰 글자 4.99), 버튼·아이콘 같은 비텍스트 요소는 바탕과 3:1 이상. 상태 표시는 색에만 맡기지 않고 글자·모양을 함께 쓴다(예약 가능: 초록 ● + 글자, 품절: 회색 빗금 네모 + 글자). 링크에는 밑줄을 둔다. 모든 화면은 흑백과 제2색각 시뮬레이션으로 한 번씩 확인한다.핵심 정리
- 색각이상은 드물지 않다. 적록 색각이상은 북유럽계 남성의 약 8%, 동아시아 남성의 대략 4~6%로 보고되며, 제2색각이상이 가장 흔하다.
- 색각이상 시뮬레이션(Machado 외 2009 등)은 구분이 어려운 색 쌍을 찾는 도구이지 그 사람이 보는 화면 그대로가 아니다.
- WCAG 2 대비비는 두 색의 상대 휘도 비율이다. 본문 글자 4.5:1, 큰 글자(24 px, 굵게 약 18.7 px 이상) 3:1, 버튼 경계·아이콘·차트 선 같은 비텍스트 요소 3:1이 최소 기준이다.
- 대비는 색상과 채도가 아니라 명도에서 나온다. 선명한 노랑 글자, 같은 명도의 빨강과 초록은 대비가 거의 없다.
- APCA는 다음 기준의 후보로 검토되는 참고용 방식이며, 아직 지켜야 하는 기준은 WCAG 2다.
- 색을 유일한 단서로 쓰지 않는다(WCAG 1.4.1). 글자, 모양, 위치, 패턴, 밑줄을 함께 쓰고, 차트에는 범례 대신 직접 이름을 단다.
- 범주 팔레트는 색상과 함께 명도도 벌리고, 색각이상 시뮬레이션 뒤의 색차로 구분도를 확인한다.
확인 퀴즈
1. 흰 바탕 위 16 px 본문 글자의 대비가 3.8:1이다. WCAG 2.2의 AA 기준에 대한 판단으로 맞는 것은?
2. 쇼핑몰의 재고 표시가 "초록 점 = 재고 있음, 빨간 점 = 품절"뿐이다. 가장 알맞은 고치기는?
3. 색각이상 시뮬레이션 도구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4. 범주 여섯 개를 구분하는 차트 팔레트를 OKLCH에서 명도·채도를 모두 같게 두고 색상만 60°씩 돌려 만들었다. 가장 먼저 생길 문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