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8

위계

동네 게시판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안내문 한 장에 2초도 쓰지 않는다. 그 2초 동안 "무슨 모임인지", "언제인지", "어디인지"가 순서대로 들어와야 걸음을 멈춘다. 서윤이 만든 여름 낭독 모임 안내문의 첫 시안은 제목, 날짜, 장소, 본문, 신청 방법이 거의 같은 크기에 모두 굵었다. 어느 것도 틀리지 않았는데,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글자에 순서를 주는 일을 위계(Hierarchy)라고 한다. 이 장은 크기, 굵기, 색, 간격, 위치라는 다섯 가지 손잡이로 위계를 만들고, 크기를 몇 배씩 키울지 정하는 모듈 스케일과, 단계를 늘릴수록 오히려 위계가 흐려지는 이유를 본다.

모두 같아 보이는 안내문

위계가 없는 지면은 모든 정보가 동시에 손을 드는 교실과 같다. 하나하나는 분명한데 누구 말을 먼저 들어야 할지 모른다. 위계는 독자에게 읽는 순서를 제안한다. 가장 먼저 볼 것(무슨 일인가), 그다음 볼 것(언제, 어디서), 관심이 생기면 읽을 것(자세한 내용), 필요한 사람만 찾아 읽을 것(신청 방법)을 지면 위에서 구별해 준다. 이 순서는 디자이너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글의 내용과 독자의 상황이 정한다. 같은 날짜라도 게시판 안내문에서는 두 번째로 중요하지만, 영수증에서는 맨 아래 작은 글씨가 맞다.

아래 시뮬레이터는 같은 안내문 한 장에 위계를 주는 방법을 하나씩만 써 본다. 처음에는 모든 글자가 같은 크기, 같은 굵기, 같은 색, 같은 간격이다. 변수를 하나 고르고 세기를 올려, 그 변수 하나만으로 순서가 얼마나 생기는지 본다.

SIMULATOR

위계의 다섯 손잡이를 하나씩

시각적 무게 순서(모형)—
가장 무거운 ÷ 가장 가벼운(글자 한 자)—
해볼 것: ① 세기 0에서 안내문을 본다. 정보는 다 있는데 어디서 시작할지 모른다. ② "크기"를 고르고 세기를 50%까지 올린다. 제목이 먼저, 날짜와 장소가 그다음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크기는 가장 강한 손잡이다. 100%까지 밀면 제목이 지면을 다 차지해 본문이 밀려난다. ③ "굵기"를 고른다. 순서가 생기기는 하지만 크기보다 약하다(가장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차이가 1.9배에 그친다). "색"을 고르면 뜻밖의 일이 생긴다. 제목을 책방 초록으로 바꿨더니 짙은 색 그대로인 장소보다 가벼워진다. 색상은 "다르다"는 신호이지 "무겁다"는 신호가 아니다. 흑백 단추를 누르면 색이 만든 차이는 명도 차이만 남는다. ④ "간격"을 고른다. 글자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날짜와 장소가 한 묶음으로, 본문이 다른 묶음으로 갈린다. 간격은 순서보다 묶음을 만든다. ⑤ "위치"를 고른다. 신청 방법이 아래쪽 끝으로 가며 "필요한 사람만 찾아 읽는 것"이 된다. (무게 순서는 이 책이 정한 간단한 모형으로, 글자 한 자의 무게를 크기의 제곱 × 굵기 계수(400은 1, 700은 1.5, 900은 1.9) × 흰 바탕과의 명도 차로 셈했다. 간격과 위치는 이 모형의 무게를 바꾸지 않으므로 순서도 그대로다. 실제로 눈이 가는 순서는 그림, 위치, 독자의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다섯 손잡이는 힘이 다르고 하는 일도 조금씩 다르다. 크기는 가장 강하게 순서를 만든다. 굵기는 같은 크기 안에서 무게를 더하고, 색은 성격을 구별하지만(날짜는 강조색, 문의는 차분한 색) 흑백에서는 약해진다. 간격과 위치는 순서보다 관계를 만든다. 무엇이 무엇과 한 묶음인지, 무엇이 따로 떨어져 있는지. 그래서 실제 지면은 거의 언제나 두세 개의 손잡이를 함께 쓴다. 다만 한 요소에 손잡이를 다 몰아 주면(크고, 굵고, 빨갛고, 밑줄까지) 강조가 아니라 소음이 된다.

크기, 굵기, 색, 간격, 위치

아래 그림은 같은 세 줄에 위계를 주는 다섯 가지 방법을 나란히 놓은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지면의 성격과 쓸 수 있는 자원에 따라 고른다. 휴대폰 알림처럼 크기를 키울 공간이 없으면 굵기와 색으로, 흑백 복사될 안내문이면 크기와 굵기로, 글자를 하나도 바꿀 수 없는 법률 문서면 간격과 위치로 위계를 준다.

낭독 모임 8월 7일 토요일 책방 E 2층 ① 크기 낭독 모임 8월 7일 토요일 책방 E 2층 ② 굵기 낭독 모임 8월 7일 토요일 책방 E 2층 ③ 색 낭독 모임 8월 7일 토요일 책방 E 2층 ④ 간격 낭독 모임 8월 7일 토요일 책방 E 2층 ⑤ 위치
그림 1. 같은 세 줄, 다섯 가지 위계. ①은 크기만, ②는 굵기만, ③은 색만, ④는 간격만, ⑤는 위치만 바꿨다. 크기는 순서를 가장 분명하게 만들고, 간격과 위치는 순서보다 묶음을 만든다(④에서 날짜와 장소는 한 덩어리가 된다). 그룹을 만드는 간격의 원리는 CompositionBook의 게슈탈트 장에서 본 근접의 법칙과 같다.

각 손잡이에는 알아 둘 성질이 있다. 크기는 넓이로 작용한다. 글자 크기를 1.5배로 키우면 획의 길이는 1.5배지만 차지하는 넓이는 2.25배가 되므로,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진다. 굵기는 같은 글꼴 가족 안에서 두 단계 정도 건너뛰어야(보통 400과 700) 차이가 분명하다. 한 단계 차이(400과 500)는 작은 글자에서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색은 명도 차이가 있어야 위계로 읽힌다(ColorBook 6장). 같은 명도의 다른 색상은 "종류가 다르다"는 신호이지 "더 중요하다"는 신호가 아니다. 그리고 7장의 대비 기준은 위계를 위해 옅게 만든 글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계를 낮춘다고 읽히지 않게 해서는 안 된다.

모두 강조하면 아무것도 강조되지 않는다 첫 시안이 실패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중요한 것을 빠뜨리면 안 된다"는 마음이다. 제목도 굵게, 날짜도 굵게, 장소도 굵게, 문의처도 굵게 하면 굵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다. 위계는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하나를 키우기 전에, 나머지를 얼마나 내려놓을 수 있는지 먼저 본다.

모듈 스케일: 크기를 몇 배씩 키울까

크기로 위계를 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질문은 "몇 포인트로 할까"다. 본문 11pt에 제목 20pt, 소제목 15pt처럼 그때그때 정하면 지면마다 크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비슷한 크기들이 쌓여 위계가 흐려진다.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가 미리 정한 크기의 사다리, 곧 크기 단계(Type scale)를 두고 그 안에서만 고른다.

활판 인쇄 시절에는 활자 크기 자체가 정해져 있었다. 캐나다의 타이포그래퍼 로버트 브링허스트(Robert Bringhurst)는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의 요소』(The Elements of Typographic Style, 1992)에서 6, 7, 8, 9, 10, 11, 12, 14, 16, 18, 21, 24, 36, 48, 60, 72pt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크기 사다리를 소개하며, 크기를 이렇게 정해진 간격에서 고르라고 권했다. 2011년 웹 디자이너 팀 브라운(Tim Brown)은 이 생각을 화면으로 옮겨, 기준 크기에 일정한 비율을 거듭 곱해 단계를 만드는 모듈 스케일(Modular scale)을 소개했다.

$$s_n = s_0 \times r^{\,n}$$
\(s_0\): 기준 크기(보통 본문), \(r\): 비율, \(n\): 단계(위로 1, 2, 3…, 아래로 −1, −2…). 비율에는 흔히 음악의 음정 이름을 붙인다. 1.125(장2도), 1.2(단3도), 1.25(장3도), 1.333(완전4도), 1.5(완전5도), 2(옥타브). 황금비 1.618도 자주 쓰인다.

음정 이름은 두 음의 진동수 비율에서 빌려 온 것일 뿐, 그 비율의 글자 크기가 음악처럼 "조화롭게" 들린다는 근거는 없다. 황금비도 마찬가지다(CompositionBook 비례 장). 모듈 스케일의 쓸모는 비율의 신비가 아니라 일관성에 있다. 크기를 몇 개의 단계로 묶어 두면 비슷한 크기가 섞이지 않고, 여러 지면이 같은 사다리를 공유한다. 비율이 작으면 단계가 촘촘해 미묘한 위계에 맞고, 크면 단계가 성겨 대비가 강한 포스터에 맞는다.

아래에서 기준 크기와 비율을 바꿔 사다리를 만들어 본다. 오른쪽 그래프의 맨 위 점을 위아래로 끌면 비율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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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 스케일 만들기

그래프 맨 위 점을 위아래로 끈다
비율—
단계별 크기(pt)—
맨 위 ÷ 기준—
해볼 것: ① 11pt, 1.5, 3단계에서 시작한다. 11 → 16.5 → 24.75 → 37.1pt. 세 걸음 만에 본문의 3.4배가 된다. ② 비율을 1.125로 바꾼다. 같은 세 걸음이 11 → 12.4 → 13.9 → 15.7pt로, 이웃 단계끼리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단계를 6까지 올려도 맨 위가 22pt에 그친다. ③ 2(옥타브)로 바꾸고 단계를 5로 올린다. 맨 위가 352pt, A4 세로 길이의 절반이 넘는 크기가 된다. 비율이 크면 금세 지면 밖으로 나간다. ④ 맨 위 점을 끌어 비율을 1.05 근처까지 내린다. 사다리가 한 덩어리로 뭉친다. (전통 크기는 브링허스트가 소개한 활판 시대의 크기 목록이다. 그래프는 로그 눈금이라 일정한 비율은 직선이 된다.)

그래프에서 모듈 스케일은 곧은 직선이 되고, 전통 사다리의 점들은 그 직선들 주위에 흩어진다. 작은 크기에서는 1pt씩 촘촘하게(9, 10, 11, 12), 큰 크기에서는 성기게(24, 36, 48) 놓인 것이 보인다. 비율은 일정하지 않지만, 큰 크기일수록 간격을 넓힌다는 생각은 같다. 사람이 크기의 차이를 절댓값이 아니라 비율로 느끼기 때문이다. 9pt와 10pt의 차이는 보이지만 60pt와 61pt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두세 단계면 충분한 이유

위계를 세우다 보면 단계를 자꾸 늘리고 싶어진다. 제목, 부제, 날짜, 장소, 시간, 본문, 강조 본문, 주석, 문의처… 각자 조금씩 다른 크기를 주면 정보의 차이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면에는 크기의 바닥과 천장이 있다. 바닥은 읽힐 수 있는 가장 작은 크기(7장에서 정한 최소 크기)이고, 천장은 지면에 들어가는 가장 큰 크기다. 이 범위가 정해진 채 단계 수를 늘리면, 이웃한 두 단계의 비율은 반드시 줄어든다.

$$r = \left(\frac{s_{\max}}{s_{\min}}\right)^{1/(N-1)}$$
\(N\): 단계 수, \(s_{\max}/s_{\min}\): 가장 큰 크기와 가장 작은 크기의 비. 본문 11pt부터 제목 37pt까지라면 비가 약 3.4이고, 세 단계면 이웃 비율이 1.83, 네 단계면 1.5, 여섯 단계면 1.27, 여덟 단계면 1.19가 된다.

이웃 단계의 비율이 작아지면 두 단계가 따로 있을 때는 달라 보여도, 지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때는 같은 단계로 읽힌다. 아래 시뮬레이터의 오른쪽 열은 단계들을 뒤섞어 놓은 것이다. 단계 수를 늘려 가며 섞인 열에서 순서를 맞힐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본다.

SIMULATOR

단계를 늘리면 이웃 단계가 녹아 붙는다

이웃 단계 비율—
가장 가까운 두 단계—
해볼 것: ① 3단계(11 · 20.2 · 37pt)에서 오른쪽 섞인 열을 본다. 정답을 보지 않고도 순서가 한눈에 보인다. ② 단계를 5로 올린다. 이웃 비율이 1.35로 줄고, 섞인 열에서 가운데 단계들을 헷갈리기 시작한다. ③ 8단계로 올린다. 이웃 비율이 1.19, 가장 가까운 두 단계가 11pt와 13.1pt다. 섞인 열에서 순서를 맞힌 뒤 "정답 보기"로 확인한다. ④ 단계를 8로 둔 채 가장 큰 크기를 60pt까지 올린다. 범위를 넓히면 이웃 비율이 다시 커진다. 단계를 늘리려면 지면이 커야 한다. (크기는 가장 작은 크기 11pt와 가장 큰 크기 사이를 같은 비율로 나눴다. 구별되는 정도는 글꼴, 굵기, 거리, 지면 위의 거리에 따라 다르다.)

얼마나 다르면 "다른 단계"로 읽힐까. 실험실에서 두 선분의 길이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사람은 몇 퍼센트의 차이도 알아챈다. 그러나 위계에 필요한 것은 "알아챌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지면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어도 한눈에 같은 단계와 다른 단계가 갈리는 차이"다. 이 문턱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수치는 이 책이 확인한 범위에서는 없다. 실무에서는 이웃 단계가 적어도 1.2~1.25배는 달라야 크기만으로 구별된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이것은 경험칙이다. 위 시뮬레이터에서 각자 문턱을 찾아보는 것이 더 정직하다.

그래서 경험 많은 디자이너들은 크기 단계를 적게 쓰고, 단계 사이를 넓힌다. 한 장짜리 안내문이라면 크기는 두세 단계면 대개 충분하다. 그 이상 구별이 필요하면 크기 단계를 늘리기보다 같은 크기 안에서 굵기나 색, 간격을 쓴다. 예를 들어 "신청 방법"과 "본문"을 다른 크기로 나누는 대신 같은 크기에 색만 차분하게 바꾸는 식이다. 크기는 가장 강한 손잡이라 아껴 쓸수록 힘이 세다.

크기는 셋, 나머지는 굵기와 색으로 편집 디자인 현장에서 흔히 쓰는 요령이 있다. 먼저 원고의 모든 요소에 "꼭 먼저 읽혀야 하는 것(1)", "그다음(2)", "읽고 싶은 사람만(3)"의 번호를 연필로 매긴다. 번호는 셋을 넘기지 않는다. 그다음 1·2·3에 크기 단계를 하나씩 주고, 같은 번호 안에서 더 나눠야 하는 것은 굵기·색·간격으로만 나눈다. 시안이 나오면 한도경처럼 연필로 다시 번호를 매겨 본다. 처음 매긴 번호와 지면에서 읽히는 번호가 다르면, 다시 고칠 곳이다.

크기 대신 굵기: 무게를 맞추는 법

크기 단계를 아끼려면 굵기와 색으로 무게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굵은 작은 글자와 보통 굵기의 큰 글자는 어느 쪽이 더 무거워 보일까. 시각적 무게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쉽게 잴 수 있는 것은 글자가 종이 위에 놓는 잉크의 양(Ink area)이다. 같은 낱말을 크기와 굵기를 바꿔 가며 그리고, 검은 점의 수를 세어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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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게 쓴 작은 글자와 보통 굵기의 큰 글자

높이 비(오른쪽 ÷ 왼쪽)—
잉크 양 비(오른쪽 ÷ 왼쪽)—
왼쪽(400)이 같은 잉크가 되는 크기—
해볼 것: ① 왼쪽은 보통 굵기(400) 32px로 고정이다. 오른쪽을 굵게(700) 22px로 두면 높이는 0.72배, 잉크 양은 0.74배다. 크기를 26px까지 올리면 높이는 0.83배인데 잉크 양이 왼쪽과 같아진다(약 1.0). 크기가 작아도 무게는 같을 수 있다. ② "아주 굵게 900"으로 바꾼다. 24px, 높이 0.79배에서 벌써 잉크 양이 왼쪽과 같다. ③ "보통 400"으로 바꾸면 크기를 32px까지 올려야 무게가 같아진다. 굵기를 쓰면 크기 단계를 하나 아낄 수 있다는 뜻이다. ④ 흑백 단추를 눌러도 결과는 같다. 굵기는 흑백 복사에서도 살아남는 손잡이다. (잉크 양은 화면에 그린 글자의 어두운 정도를 모두 더한 값이다. 시각적 무게는 잉크 양 말고도 모양의 복잡도, 색, 둘레의 여백에 따라 달라진다. 글꼴은 Noto Sans KR의 400·700·900이다.)

잉크 양으로 보면, 굵게 쓴 글자는 높이가 80% 남짓만 되어도 보통 굵기의 큰 글자와 비슷한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크기 단계 두 개 사이에 굵기를 끼워 넣으면 크기 단계를 늘리지 않고도 중간 무게를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이미 큰 제목을 굵게까지 하면 무게가 겹으로 늘어나 다른 요소를 모두 누른다. 제목을 크게 할 때 굵기를 오히려 내리는 디자이너가 있는 이유다. 큰 글자는 가늘어도 충분히 무겁다.

간격도 위계다

글자 크기를 하나도 바꾸지 않고도 위계를 만들 수 있다. 앞의 그림 1 ④처럼, 관련된 것끼리는 가깝게, 다른 것과는 멀게 두면 독자는 덩어리를 먼저 보고 그 안을 나중에 읽는다. 간격이 만드는 위계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 크기가 아니라 비율이다. 묶음 안의 줄 간격보다 묶음 사이의 간격이 충분히 커야 묶음이 보인다. 아래에서 손잡이를 끌어 날짜·장소 묶음과 본문 사이의 간격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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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 안의 간격과 묶음 사이의 간격

묶음 사이의 손잡이를 위아래로 끈다
사이 ÷ 안—
읽히는 덩어리—
해볼 것: ① 시작은 묶음 안과 사이가 같은 6pt다. 다섯 줄이 한 덩어리로 보이고, 날짜·장소가 본문의 첫 두 줄처럼 읽힌다. ② 손잡이를 끌어 사이 간격을 12pt, 18pt로 늘린다. 두 배쯤부터 날짜·장소 묶음이 떨어져 보인다. ③ 반대로 묶음 안 줄 간격을 사이 간격보다 크게 만든다. 날짜와 장소가 서로 멀어지고 장소가 본문에 붙는다. 간격이 거꾸로 되면 묶음도 거꾸로 읽힌다. (글자는 모두 11pt로 같다. "읽히는 덩어리" 판단은 사이 간격이 안 간격의 1.5배 미만이면 "한 덩어리", 1.5~2배면 "약하게 나뉨", 2배 이상이면 "두 덩어리"로 이 책이 정한 대략의 표시다.)

간격의 위계는 가장 조용한 위계다. 굵기나 색처럼 눈에 띄지 않으면서 읽는 순서를 정리한다. 그래서 정보가 많은 지면일수록 간격부터 정하고, 그다음에 크기와 굵기를 더하는 편이 깔끔하다. 단락 사이 간격과 들여쓰기는 10장에서, 간격을 일정한 격자로 묶는 방법은 9장에서 이어서 다룬다.

오려 붙이는 위계 안내문 원고(제목, 날짜, 장소, 본문, 신청 방법)를 세 가지 크기로 출력하거나 손으로 쓴다. 예를 들어 제목은 큰 글씨, 날짜와 장소는 중간, 나머지는 작은 글씨로. 각 요소를 가위로 오려 A4 종이 위에 올려놓고, 풀칠하지 않은 채 자리를 옮겨 본다. 먼저 크기는 그대로 두고 간격과 위치만으로 세 가지 배치를 만든다. 휴대폰으로 각 배치를 찍어 흑백으로 바꾸고 화면을 작게 줄여 본다. 무엇이 가장 먼저 보이는지, 날짜와 장소가 한 묶음으로 보이는지, 신청 방법을 찾을 수 있는지 적는다. 가장 나은 배치를 고른 뒤에야 풀칠한다. 화면에서는 몇 번의 클릭으로 끝나는 일을 손으로 하면, 자리 하나를 옮기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는지 몸으로 알게 된다.

흐리게 보기 테스트와 실제 작품

위계를 점검하는 가장 값싼 방법은 지면을 흐리게 보는 것이다. ColorBook 6장의 "눈을 가늘게 뜨는 점검"과 같은 원리다. 흐리게 보면 글자를 읽을 수 없으므로 내용이 아니라 무게의 배치만 남는다.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덩어리가 몇 개로 보이는지, 처음 의도한 순서와 같은지를 본다. 지면을 몇 걸음 떨어져 보거나, 화면을 엄지손톱만 하게 줄이는 것도 같은 시험이다.

이 시험을 19세기 말의 포스터에 해 본다. 파리의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가 카바레 물랭 루주를 위해 만든 첫 포스터다.

툴루즈로트레크의 세로로 긴 석판화 포스터. 위쪽에 붉은 글자 MOULIN ROUGE가 세 번 반복되고 그 왼쪽에 커다란 M이 세로로 서 있다. 오른쪽에는 검은 글자 CONCERT, BAL, TOUS LES SOIRS가, 그 아래 LA GOULUE가 있다. 가운데에는 흰 치마를 입고 춤추는 여인과 검은 실루엣의 관객들, 앞쪽에 회색 실루엣의 남자가 있다. 아래쪽에 붉은 글자로 MOULIN ROUGE, les Mercredis et Samedis, BAL MASQUÉ가 쓰여 있다.
그림 2.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물랭 루주: 라 굴뤼」, 1891. 세 장의 종이를 이어 붙인 높이 약 1.9 m의 대형 포스터다. 이 사진(높이 1600px)에서 대문자 높이를 대략 재어 보면, 왼쪽 위의 큰 M이 약 360px, 아래의 BAL MASQUÉ가 약 185px, 위쪽의 MOULIN ROUGE가 약 68px, TOUS LES SOIRS가 약 25px로, 크기가 여섯 가지가 넘고 가장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가 열 배를 훌쩍 넘는다. "두세 단계면 충분하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깬다. 그런데도 무질서해 보이지 않는 것은 붉은 글자(장소와 행사)와 검은 글자(공연 내용과 무용수 이름)가 색으로 두 가족을 이루고, 같은 말(MOULIN ROUGE)을 되풀이해 크기 대신 반복으로 무게를 주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멀리 보이도록 만든 포스터라는 목적이 이런 강한 대비를 정당화한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Harris Brisbane Dick Fund, 1932), 4색 석판화, 우브지 세 장. 공공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소장처 작품 페이지 · 크레딧
툴루즈로트레크의 포스터. 검은 드레스와 큰 모자의 여인이 옆모습으로 앉아 있고 그 옆에 지팡이를 든 남자가 있다. 맨 위에 Divan Japonais라는 큰 글자, 그 아래 작게 75 rue des Martyrs, 왼쪽 아래에 Ed Fournier directeur가 손글씨처럼 쓰여 있다.
그림 3.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디방 자포네」, 1892–93. 같은 작가가 만든 다른 카바레 포스터는 정반대로 글자를 아낀다. 맨 위의 가게 이름, 바로 아래 작은 주소, 왼쪽 아래 구석의 주인 이름까지 크기가 세 가지뿐이고, 나머지는 그림이 맡는다. 주소를 가게 이름 바로 밑에 붙여 한 묶음으로 만든 것은 앞 절의 간격 위계 그대로다. 같은 작가, 같은 시대, 같은 종류의 포스터라도 무엇을 전하려는가에 따라 위계의 강도가 달라진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Bequest of Clifford A. Furst, 1958), 4색 석판화, 우브지. 공공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소장처 작품 페이지 · 크레딧

아래 시뮬레이터로 두 포스터와 서윤의 안내문 시안을 흐리게 본다. 경계선을 끌어 원본과 흐린 모습을 비교하고, 흐림 정도를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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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게 보면 남는 순서

원본의 명도 대비(L* 표준편차)—
흐린 뒤 남은 명도 대비—
해볼 것: ① "안내문 첫 시안"을 흐린다. 회색 띠 여러 줄이 비슷한 진하기로 남아 어디부터 볼지 정해지지 않는다. ② "고친 안"으로 바꾼다. 같은 흐림에서 제목 덩어리 하나, 날짜·장소 덩어리 하나, 옅은 본문 덩어리 하나, 세 층이 남는다. ③ "물랭 루주"를 최대로 흐린다. 글자는 다 사라져도 위쪽 붉은 덩어리와 아래쪽 BAL MASQUÉ의 붉은 덩어리, 가운데 흰 치마가 남는다. 크기가 여섯 가지가 넘어도 흐리면 몇 개의 큰 덩어리로 정리된다. ④ "디방 자포네"는 흐리면 글자보다 검은 드레스가 먼저 남는다. 이 포스터의 첫 번째 위계는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다. (흐림은 선형광에서의 상자 흐림 두 번이다. 작품 사진의 색과 명도는 촬영과 화면에 따라 원작과 다르다.)

흐리게 보기는 글자뿐 아니라 그림과 여백까지 포함한 지면 전체의 위계를 보여 준다. 디방 자포네처럼 그림이 첫 번째 위계를 맡는 지면이라면, 글자의 위계는 그 그림 다음 순서에서 시작한다. 안내문에 그림을 넣는다면 그림과 제목 중 무엇이 먼저 읽혀야 할지부터 정해야 한다. 그림과 글이 같은 무게로 다투면 둘 다 약해진다.

옛 책의 위계: 본문과 협주

위계는 인쇄 포스터의 발명품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옛 책은 수백 년 동안 크기와 위치만으로 정교한 위계를 만들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협주(夾註, Interlinear commentary)다. 경전의 본문은 큰 글자로 한 줄에 쓰고, 그 뜻을 풀이한 주석은 본문 글자의 절반쯤 되는 작은 글자로 같은 줄 안에 두 줄로 나눠 넣는다. 그래서 흔히 "두 줄로 쓴 작은 주"라는 뜻으로 쌍행주(雙行註)라고도 부른다. 본문과 주석이 같은 줄 흐름 안에 있어 끊김 없이 읽히면서도, 크기만 보고 둘을 바로 구별할 수 있다.

學而時習之 學之爲言效也習鳥數飛也 不亦說乎 본문: 큰 글자 한 줄 「논어」 첫 구절 협주: 절반 크기 두 줄 같은 줄 폭 안에 나란히
그림 4. 협주의 짜임(이 책이 다시 그린 도식). 오른쪽 줄의 큰 글자 「學而時習之(배우고 때때로 익힌다)」 아래에, 같은 줄 폭 안에서 작은 글자 두 줄이 주석을 단다. 여기 넣은 주석은 주희의 『논어집주』에 나오는 풀이를 줄인 것이다("學"은 본받는다는 말이고, "習"은 새가 자주 날갯짓하는 것이다). 그다음 줄에서 본문이 다시 큰 글자로 이어진다. 크기 두 단계와 위치만으로 "본문"과 "풀이"라는 두 층의 위계를 만들었다. 실제 판본마다 글자 수와 배치는 다르다.

협주의 크기 비율은 대략 2:1로, 앞에서 본 모듈 스케일로 치면 옥타브 한 단계다. 단계는 둘뿐이지만 그 사이가 넓어 섞일 일이 없다. 한글 조판에서도 이 전통은 이어져서, 오래된 사전이나 주석서에는 본문 사이에 작은 글자로 풀이를 넣는 방식이 남아 있다. 오늘날 웹 문서의 각주나 툴팁, 책의 옆주가 하는 일도 같다. 본문을 끊지 않으면서 다른 층의 정보를 곁에 둔다. 단계가 적을수록 단계 사이를 넓게 줄 수 있고, 넓을수록 구별이 확실하다는 이 장의 원리가 수백 년 된 지면 위에도 있다.

안내문 위계 설계기

이제 이 장의 손잡이를 모두 모아 여름 낭독 모임 안내문 한 장의 위계를 직접 짠다. A4 지면 위의 요소(제목, 날짜, 장소, 본문, 신청 방법)를 누르면 크기 단계가 0 → 1 → 2 → 3으로 차례로 바뀐다. 0이 기준 크기(본문)다. 슬라이더로 기준 크기와 비율을 정하고, 굵기와 색을 켜고 끈다. "흐리게 보기"를 켜면 지면 전체를 흐린 모습으로 점검할 수 있다.

SIMULATOR

「여름 낭독 모임」 안내문 위계 설계기

요소를 누르면 단계가 바뀐다
쓰인 크기(pt)—
가장 가까운 두 크기의 비—
제목 "한" 높이 시각(2 m)—
최소 크기 점검(7장 기준)—
해볼 것: ① "첫 시안"을 본다. 크기가 두 가지(14, 18pt)뿐인데 비율이 1.29로 작고, 모두 굵고, 색이 다섯 가지라 흐리게 보면 비슷한 띠가 여럿 남는다. ② "서윤의 선택"으로 바꾼다. 기준 11pt, 비율 1.5, 제목은 3단계(37pt), 날짜·장소는 1단계(16.5pt), 나머지는 0단계(11pt). 중간 단계(24.75pt)는 쓰지 않는다. 흐리게 보면 세 층이 또렷하다. ③ "여섯 단계"로 바꾼다. 모든 요소에 다른 크기를 줬더니 비율 1.2의 이웃 단계가 서로 붙어 보이고, 흐리게 보면 순서가 오히려 흐려진다. ④ 서윤의 선택에서 기준 크기를 8pt로 내린다. 신청 방법과 본문이 7장에서 정한 인쇄 최소 크기 아래로 떨어져 경고가 뜬다. (크기는 기준 × 비율^단계를 0.5pt 단위로 반올림했고, A4 지면을 화면 폭에 맞춰 줄여 그렸다. 시각은 Noto Sans KR의 "한" 높이 비율로 셈했다. 굵게는 700, 색 절제는 제목 책방 초록, 날짜 강조색, 신청 방법 차분한 초록, 나머지 짙은 색이다.)

설계기에서 여섯 단계와 세 단계를 비교하면, 크기를 더 세밀하게 나눈 쪽이 오히려 순서가 덜 보인다. 위계는 정보의 차이를 모두 지면에 옮기는 일이 아니다. 독자가 처음 2초 동안 알아야 할 것과 나중에 찾아 읽을 것을 크게 나누고, 그 안의 작은 차이는 굵기, 색, 간격 같은 조용한 손잡이에 맡기는 일이다.

서윤의 작업 노트

CASE 서윤작업 노트 · 8장

모든 글자가 손을 들고 있었다

7월 둘째 주, 서윤은 여름 낭독 모임 안내문(A4, 인쇄와 PDF)의 첫 시안을 책방 게시판에 임시로 붙여 보았다. 제목 「여름 낭독 모임」은 18pt, 날짜("8월 7일 · 21일 토요일 오후 5시"), 장소("책방 E 2층"), 본문, 신청 방법은 모두 14pt였고, 놓칠까 봐 전부 굵게 했다. 색도 요소마다 달랐다. 지나가던 손님 둘이 안내문 앞에 섰다가 "무슨 모임이에요?" 하고 계산대에 물었다. 답은 안내문 맨 위에 있었다.

한도경은 시안을 보더니 연필로 각 줄 옆에 1, 2, 3을 적었다. 제목이 1, 날짜와 장소가 2, 본문과 신청 방법이 3이었다. "번호는 셋인데 글자 크기는 둘이고, 굵기는 하나야. 순서가 지면에 안 보이지." 이 책의 모델로 계산하면 18÷14는 약 1.29다. 흐리게 보기 테스트에서 제목과 날짜 줄은 비슷한 진하기의 띠로 남았다.

서윤의 선택은 이렇다. 크기 단계는 셋으로 하고, 비율은 1.5(완전5도)로 정했다. 7장에서 정한 인쇄 본문 최소 크기(10pt 안팎)보다 한 단계 여유를 두어 본문은 11pt, 날짜와 장소는 11 × 1.5 = 16.5pt, 제목은 11 × 1.5³ ≈ 37.1pt, 실제로는 37pt다. 그 사이의 24.75pt 단계는 일부러 비워 제목과 정보 사이를 넓혔다. 신청 방법은 본문과 같은 11pt로 두고 크기 대신 색(차분한 초록 #567666)과 위치(지면 아래쪽)로 구별했다. 굵기는 제목과 날짜·장소에만 700을 주고 나머지는 400으로 내렸다. 색은 셋으로 줄였다. 제목은 책방 초록 #2f7d5b, 날짜는 강조 #d24f39, 나머지는 짙은 색 #22342a와 차분한 초록이다. 날짜에 쓴 강조색은 흰 종이 대비 4.27이지만, 16.5pt 굵은 글자는 7장의 "큰 글자"(굵게 14pt, 약 18.66px 이상) 조건을 넘으므로 기준 3:1을 지킨다. 묶음 사이 간격은 묶음 안 줄 간격의 두 배 이상으로 두었다.

7장의 시각 계산으로 확인해 보니, 제목은 2 m 밖에서 한글 높이가 약 21′, 날짜와 장소는 1 m에서 약 18′, 본문은 손에 들고 40 cm에서 약 30′였다(굵기에 따라 조금 다르다). 지나가며 제목을 보고, 다가와 날짜를 보고, 떼어 들고 본문을 읽는 세 걸음과 세 단계가 맞아떨어진다. 흑백으로 복사한 판에서도 크기와 굵기가 남아 순서가 무너지지 않았다. 도경은 다시 번호를 매겨 보고는 "이번엔 종이에 적힌 번호랑 내 번호가 같네" 했다.

제목 3단계37pt · 700 날짜 1단계16.5pt · 700 장소 1단계 · 본문 0단계16.5pt · 11pt 신청 방법 0단계11pt · 400
이 장에서 정한 것안내문의 크기 단계는 셋(제목 · 날짜와 장소 · 본문), 비율 1.5. 본문 11pt, 날짜·장소 16.5pt(굵게 700), 제목 37pt(11 × 1.5³ ≈ 37.1, 굵게 700). 24.75pt 단계는 쓰지 않는다. 신청 방법은 11pt에 색(#567666)과 위치로만 구별한다. 색은 제목 #2f7d5b, 날짜 #d24f39, 장소·본문 #22342a, 신청 방법 #567666. 묶음 사이 간격은 묶음 안 줄 간격의 두 배 이상.
아직 남은 문제안내 책자 「골목 산책」(A5, 16쪽)에는 드로잉과 글이 함께 들어간다. 쪽마다 글과 그림의 자리를 어떻게 일정하게 정할까. 여백과 단은 얼마로 할까.
다음 단계9장: 책자의 그리드를 세운다.

핵심 정리

  1. 위계는 독자에게 읽는 순서를 제안한다. 순서는 디자이너의 취향이 아니라 글의 내용과 독자의 상황이 정한다.
  2. 위계의 손잡이는 크기·굵기·색·간격·위치다. 크기가 가장 강하고, 색은 명도 차이가 있어야 위계로 읽히며, 간격과 위치는 순서보다 묶음을 만든다.
  3. 모듈 스케일은 기준 크기에 일정한 비율을 거듭 곱해 크기 단계를 만든다. 음정·황금비 같은 이름에 특별한 지각적 근거는 없고, 쓸모는 일관성에 있다.
  4. 크기의 바닥과 천장이 정해진 채 단계를 늘리면 이웃 단계의 비율이 줄어 구별되지 않는다. 크기 단계는 두세 개로 아끼고, 더 나눌 것은 굵기·색·간격으로 나눈다.
  5. 굵기는 크기 단계를 아끼는 손잡이다. 굵은 작은 글자가 보통 굵기의 큰 글자와 비슷한 잉크 양을 가질 수 있고, 흑백에서도 살아남는다.
  6. 흐리게 보기 테스트로 무게의 배치를 점검한다. 규칙을 깬 포스터(물랭 루주)도, 협주처럼 두 단계뿐인 옛 책도, 흐리면 몇 개의 분명한 덩어리로 정리된다.

확인 퀴즈

1. 본문 10pt, 비율 1.25의 모듈 스케일에서 위로 두 단계 올라간 크기는?

모듈 스케일은 비율을 거듭 곱한다. 10 × 1.25² = 10 × 1.5625 ≈ 15.6pt다. 12.5pt는 한 단계, 15pt는 비율을 더한 값(10 + 2.5 + 2.5), 20pt는 비율 2를 한 번 곱한 값이다.

2. A4 안내문에서 가장 작은 글자는 11pt, 가장 큰 글자는 37pt로 정해져 있다. 크기 단계를 3개에서 8개로 늘리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범위가 고정되어 있으면 이웃 비율은 (37/11)^(1/(N−1))이다. N=3이면 약 1.83, N=8이면 약 1.19다. 범위는 그대로이므로 제목이 커지지 않고, 단계가 촘촘해질수록 이웃끼리 섞여 보인다.

3. 흑백으로 복사될 안내문에서 날짜만 다른 색상(같은 명도의 붉은색)으로 바꿔 강조했다. 이 강조에 대한 판단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색이 위계로 작용하려면 명도 차이가 필요하다. 같은 명도의 다른 색상은 흑백에서 구별되지 않는다(ColorBook 6장). 흑백으로 남는 위계는 크기, 굵기, 간격, 위치다. "붉은색이 주의를 끈다"는 말도 명도와 채도, 둘레 색에 따라 달라지는 통설에 가깝다.

4. 툴루즈로트레크의 「물랭 루주: 라 굴뤼」에는 크기가 여섯 가지가 넘는 글자가 쓰였다. 이 포스터가 무질서해 보이지 않는 이유로 가장 알맞은 것은?

크기 단계가 많아도 색으로 묶인 가족, 반복, 큰 덩어리 배치가 질서를 만든다. 크기를 황금비로 맞췄다는 근거는 없고, 큰 M과 BAL MASQUÉ는 화면에서 가장 큰 요소들이라 "작아서"도 아니다. 거리에서 멀리 보이게 하려는 목적이 이 강한 대비를 정당화한다.

출처와 글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