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

글자의 해부

워드프로세서에서 글꼴만 바꿨는데 같은 12포인트 글이 한 줄 더 길어지거나, 갑자기 작아 보인 적이 있을 것이다. 숫자는 그대로인데 글자는 커지고 작아진다. 글자 크기라는 숫자가 실제로 무엇의 크기인지 알면 이 수수께끼가 풀린다. 이 장은 라틴 글자를 받치는 보이지 않는 줄들과 획의 성질을 하나씩 떼어 보고, 마지막에는 손잡이를 끌어 글자 한 벌의 뼈대를 직접 늘려 본다.

보이지 않는 다섯 줄

라틴 글자는 공책의 줄처럼 보이지 않는 가로줄 몇 개에 맞춰 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글자가 발을 딛는 기준선(Baseline)이다. 소문자 x의 윗변 높이를 x높이(x-height)라 하고, 이 높이 안에 소문자의 몸통이 들어간다. 대문자 H의 높이는 캡하이트(Cap height)다. b, d, h, l처럼 x높이 위로 솟는 획을 어센더(Ascender), p, q, g처럼 기준선 아래로 내려가는 획을 디센더(Descender)라고 한다.

어센더 선 캡하이트 x높이 기준선 디센더 선 x높이 어센더 디센더 ○ 둥근 획은 x높이 선을 살짝 넘는다(오버슈트)
그림 1. 라틴 글자를 받치는 다섯 줄. 모든 글자는 기준선에 선다. 소문자 몸통은 x높이까지, 대문자는 캡하이트까지 올라간다. d의 어센더는 캡하이트보다 조금 더 높이 솟는 경우가 많고, p의 디센더는 기준선 아래로 내려간다. 동그라미 친 곳처럼 둥근 획은 선을 살짝 넘는데, 그 이유는 이 장 뒤쪽의 오버슈트에서 다룬다.

이 줄들은 글꼴 파일 안에 숫자로 들어 있지만 글자 위에 그려져 있지는 않다. 아래 시뮬레이터에서 실제 글꼴 위에 다섯 줄을 직접 맞춰 본다. 처음에는 줄이 엉뚱한 자리에 있다. 줄을 위아래로 끌어 기준선, x높이, 캡하이트, 어센더, 디센더에 맞춘 뒤 "실제 선 보기"를 켜서 확인한다.

SIMULATOR

보이지 않는 줄 찾기

선을 위아래로 끈다
맞힌 선(오차 2% 이내)—
이 글꼴의 x높이 ÷ 캡하이트—
어센더 ÷ 캡하이트—
해볼 것: ① 기준선부터 맞춘다. o의 아랫부분이 아니라 H와 x의 발끝에 맞춰야 한다. 둥근 글자는 기준선 아래로 살짝 내려가기 때문이다. ② 어센더 선을 맞춘 뒤 "실제 선 보기"를 켠다. EB Garamond에서는 d의 꼭대기가 H보다 눈에 띄게 높다. 오래된 양식의 글꼴일수록 어센더가 길고 x높이가 낮다. ③ Inter로 바꿔 같은 일을 한다. 어센더와 캡하이트가 거의 같은 높이이고, x높이가 캡하이트의 4분의 3에 이른다. (선의 실제 위치는 브라우저가 측정한 글자의 윤곽 상자에서 구했다. 기준선은 H의 아래, x높이는 x의 위, 캡하이트는 H의 위, 어센더는 d의 위, 디센더는 p의 아래다.)

네 글꼴에서 줄을 맞춰 보면, 줄들의 순서는 같은데 간격이 글꼴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B Garamond는 x높이가 캡하이트의 약 6할이고 어센더가 길다. Inter는 x높이가 캡하이트의 4분의 3쯤으로 소문자가 크고, 어센더가 짧다. 이 간격의 차이가 글꼴의 인상을 크게 바꾼다. x높이가 낮고 어센더가 긴 글꼴은 우아하고 고전적으로, x높이가 높은 글꼴은 크고 또렷하고 현대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글자 크기는 무엇의 크기인가

"12포인트"라고 할 때 12포인트는 글자 H의 높이도, x의 높이도 아니다. 금속 활자 시절, 활자는 글자 하나를 윗면에 새긴 직육면체 금속 조각이었다. 이 조각의 몸통 높이가 활자 크기였고, 글자는 그 몸통 위에 위아래 여유를 두고 새겨졌다. 디지털 글꼴은 이 몸통을 em 상자(Em square)라는 가상의 네모로 물려받았다. 글자 크기 12포인트는 이 상자의 높이가 12포인트라는 뜻이고, 그 안에 글자를 얼마나 크게 그려 넣을지는 글꼴 디자이너가 정한다.

em 캡하이트 em의 65~73% 라틴 글자 위아래에 여유(어깨)가 크다 한 한글 글자가 상자를 거의 채운다
그림 2. 활자의 몸통과 em 상자. 왼쪽은 금속 활자를 단순하게 그린 것이다. 몸통의 높이(em)가 글자 크기이고, 대문자 H는 그 안에서 위아래 여유를 두고 새겨진다. 이 장에서 쓰는 네 라틴 글꼴을 측정하면 캡하이트는 em의 65~73%다. 오른쪽의 한글은 같은 em 상자를 점선 칸 가까이까지 채운다. 그래서 같은 크기로 섞어 쓰면 라틴 글자가 한글보다 작아 보이고, 이 둘을 맞추는 일이 한글 조판의 오랜 숙제가 된다(3장).

그래서 같은 12포인트라도 x높이가 em의 40%인 글꼴과 55%인 글꼴은 소문자의 실제 크기가 1.4배쯤 차이 난다.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부분 소문자이므로, 체감 크기를 정하는 것은 글자 크기라는 숫자보다 x높이다. 아래 시뮬레이터는 네 글꼴을 같은 글자 크기로 짠 것과, x높이가 같아지도록 크기를 조정한 것을 겹쳐 놓았다. 경계선을 끌어 비교한다.

SIMULATOR

같은 크기, 다른 크기

같은 크기일 때 x높이—
가장 큰 ÷ 가장 작은 x높이—
x높이를 맞추려면 EB Garamond를—
해볼 것: ① 경계선을 오른쪽 끝까지 끌어 "같은 글자 크기"만 본다. 넷 다 같은 크기인데 EB Garamond는 눈에 띄게 작고 Inter는 크다. ② 왼쪽 끝까지 끌어 "같은 x높이"를 본다. 소문자 크기가 맞자 이번에는 대문자와 어센더의 높이가 들쭉날쭉해진다. 무엇을 맞추면 다른 무엇이 어긋난다. ③ 크기를 10까지 내린다. 작은 크기에서는 x높이의 차이가 곧 읽히고 안 읽히고의 차이가 된다. Playfair의 숫자 1820이 기준선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본다. 이런 숫자를 올드스타일 숫자라고 한다. (x높이는 각 글꼴의 x를 브라우저가 측정한 높이다. CSS의 font-size-adjust가 오른쪽처럼 x높이를 기준으로 크기를 맞추는 기능이다.)

여러 글꼴을 한 지면에 섞을 때, 혹은 글꼴을 바꿀 때 "같은 크기로" 바꾸면 글이 갑자기 커지거나 작아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본문 글자 크기를 정할 때 다른 사람의 추천 숫자를 그대로 가져오기 전에, 그 숫자가 어떤 글꼴의 숫자인지 확인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이 책의 뒤쪽 장들이 정하는 크기는 항상 어떤 글꼴 기준인지 함께 적는다.

글꼴을 바꾸면 크기부터 다시 본다 편집 디자이너들은 본문 글꼴 후보를 비교할 때 같은 포인트로 놓고 비교하지 않는다. 먼저 후보들의 x높이가 비슷해지도록 크기를 조정한 뒤(예: 한 글꼴은 10pt, 다른 글꼴은 10.5pt), 같은 단락을 출력해 나란히 놓고 본다. 그래야 "이 글꼴이 더 읽기 좋다"는 판단이 글꼴의 성격에서 온 것인지, 단지 더 크게 보여서인지 가를 수 있다. 화면에서도 같다. 글꼴을 바꾸고 나면 행간과 줄 길이도 다시 확인한다. x높이가 높은 글꼴은 같은 행간에서도 줄 사이가 더 좁아 보인다.

한글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한글 글자는 em 상자를 거의 채우고,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가 상자 안에서 차지하는 높이도 다르다. 라틴 글자처럼 "몸통 높이"라는 하나의 기준선이 뚜렷하지 않다. 한글이 라틴 글자의 기준선과 만날 때 생기는 문제는 3장에서 다룬다.

획: 대비와 축은 펜에서 왔다

글자를 이루는 선을 획(Stroke)이라 한다. 많은 글꼴에서 획은 굵기가 고르지 않다. 세로획은 굵고 가로획은 가늘며, o 같은 둥근 글자는 어떤 곳은 굵고 어떤 곳은 가늘다. 가장 굵은 획과 가장 가는 획의 차이를 대비(Contrast), 둥근 획에서 가는 부분끼리 이은 선의 기울기를 축(Stress, axis)이라고 한다.

이 굵기 변화는 디자이너가 마음대로 정한 장식이 아니라, 끝이 납작한 펜으로 글씨를 쓰던 역사에서 왔다. 납작한 펜촉은 펜촉의 넓은 면을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굵은 선을, 펜촉의 가장자리 방향으로 움직이면 가는 선을 낸다. 펜촉의 각도를 고정한 채 o를 쓰면 굵은 곳과 가는 곳이 저절로 생기고, 가는 곳은 펜촉의 각도만큼 기울어진 자리에 온다.

17세기 초의 서법 연습장. 겹선 테두리 안에 대문자와 소문자 알파벳이 펜으로 길게 이어 쓰여 있고, 몇몇 대문자에는 크게 휘감기는 장식 획이 붙어 있다.
그림 3. 작가 미상, 「서법 연습: 여러 서체로 쓴 알파벳」, 17세기 초. 펜으로 쓴 대문자와 소문자가 한 줄에 이어진다. 소문자들이 같은 높이(x높이)를 지키며 늘어서고, b, d, h, l의 어센더와 p, q, g의 디센더가 그 위아래로 뻗는다. 획을 자세히 보면 펜이 내려가는 세로획은 굵고, 비스듬히 올라가는 연결 획은 머리카락처럼 가늘다. 대비가 펜의 움직임에서 생긴다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흑백" 단추로 보면 장식 획의 굵기 변화가 더 잘 드러난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Purchase, Daniel Ergmann Gift, 2014), 종이에 펜, 검은색·갈색 잉크. 공공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소장처 작품 페이지 · 크레딧

아래 시뮬레이터는 납작한 펜촉으로 낱말 "one"을 쓴다. 글자의 뼈대(가는 회색 선)는 그대로 두고, 펜촉의 각도만 바꾼다. 오른쪽 위의 원판에서 펜촉을 끌어 돌린다. 빨간 점선은 o에서 가장 가는 두 곳을 이은 선, 곧 축이다.

SIMULATOR

납작한 펜촉으로 쓰기

오른쪽 위 원판의 펜촉을 돌린다
펜촉 각도(수평에서)—
세로획 : 가로획 굵기—
축의 기울기—
해볼 것: ① 처음 각도 30°에서 o를 본다. 왼쪽 위와 오른쪽 아래가 가늘고, 축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그림 3의 펜글씨와 오래된 양식의 활자에서 보는 축이다. ② 0°(펜촉을 수평으로)로 바꾼다. 세로획은 가장 굵고 가로획은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지며 축이 수직으로 선다. ③ 90°로 바꾼다. 이번에는 세로획이 가늘고 가로획이 굵어진다. 손으로 쓰면 어색하게 보이는 이 "뒤집힌 대비"는 19세기 포스터용 장식 활자처럼 일부러 눈길을 끌 때 쓰였다. ④ 펜촉 너비를 0.4까지 넓힌다. n의 속 공간이 메워진다. (뼈대를 따라 펜촉 모양의 선분을 촘촘히 찍어 쓴 모형이다. 세로획 : 가로획 굵기는 펜촉 각도가 α일 때 cos α : sin α로 계산했다. 실제 펜글씨는 쓰는 동안 각도와 압력이 조금씩 바뀐다.)

펜촉의 각도가 곧 축이 되고, 펜촉의 너비와 획의 방향이 대비를 만든다. 네덜란드의 글자 디자이너이자 교육자 헤릿 노르트제이(Gerrit Noordzij, 1931–2022)는 『획』(The Stroke, 1985)에서 이렇게 펜촉의 각도가 고정된 채 움직이는 방식을 "평행 이동"(translation), 끝이 뾰족한 펜을 눌러 획을 넓히는 방식을 "팽창"(expansion)이라 부르고, 라틴 글자의 굵기 변화를 이 두 방식으로 설명했다. 오래된 양식의 활자는 대체로 평행 이동에 가깝고 축이 기운다. 18세기 말 이후의 이른바 모던 활자는 축이 수직이고 대비가 매우 크며, 팽창에 가깝다. 이 갈래들의 이름과 역사는 4장에서 만난다.

납작한 펜 대신 연필 두 자루 연필 두 자루를 나란히 붙여 고무줄로 묶는다. 두 연필심 사이의 거리가 납작한 펜촉의 너비가 된다. 묶은 연필을 종이에 대고, 두 심을 잇는 선이 수평에서 30°쯤 기울도록 잡은 채 각도를 바꾸지 않고 o, n, e를 크게(3 cm 이상) 쓴다. 두 심이 그린 선 사이를 색연필로 칠하면 획의 굵기 변화가 드러난다. 같은 글자를 0°와 60°로도 써서 세 장을 나란히 놓고, 가는 곳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표시한다. 붓펜이 있다면 같은 글자를 눌렀다 떼며 써서 "팽창"과도 비교한다.

세리프: 획의 끝

획의 끝에 붙은 작은 돌기를 세리프(Serif)라 하고, 세리프가 없는 글꼴을 산세리프(Sans serif, 프랑스어 sans는 "없이")라고 한다. 세리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다. 고대 로마의 돌에 새긴 글자에서, 석공이 붓으로 먼저 쓴 밑글씨의 획 끝 모양을 따라 새긴 흔적이라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에드워드 커티치의 주장), 끌로 획을 깨끗이 끝맺으려던 방법이라는 설명도 있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로마 시대의 직사각형 대리석 묘비판. 붉은 안료가 남은 대문자 라틴 글자가 여섯 줄로 새겨져 있다. 맨 위에 D와 M이 떨어져 있고, 그 아래 줄들이 가운데 맞추기로 놓여 있다.
그림 4. 로마, 「묘비 명문이 새겨진 대리석 판」, 1–2세기. 아버지가 여덟 살 남짓에 세상을 떠난 아들을 위해 세운 묘비다. 글자는 모두 대문자이고, 소문자는 이보다 수백 년 뒤에 손글씨에서 생겼다. 그래서 줄은 기준선과 캡하이트 두 개뿐이다. O와 C를 보면 왼쪽 위와 오른쪽 아래가 가늘어 축이 왼쪽으로 기울었고, 획 끝에는 작은 세리프가 달려 있다. 낱말 사이에는 띄어쓰기 대신 가운뎃점을 찍었고, 줄 길이가 맞지 않는 곳은 글자 폭을 줄이거나 붙여 맞췄다. 2천 년 전의 석공도 자간과 정렬을 고민했다.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Museum Accession), 대리석. 공공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소장처 작품 페이지 · 크레딧

세리프는 모양에 따라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획과 세리프 사이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은 브래킷 세리프, 획만큼 두꺼운 네모난 슬랩 세리프, 머리카락처럼 가는 헤어라인 세리프가 대표적이다. 아래 시뮬레이터는 이 장에서 직접 만든 글자 한 벌에 세리프만 바꿔 단다. 길이 슬라이더로 세리프를 늘이고, 보는 크기 슬라이더로 그 글자를 작게 줄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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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프 갈아 끼우기

세리프 두께 ÷ 세로획—
세리프가 늘린 글자 폭—
해볼 것: ① 없음 → 브래킷 → 슬랩 → 헤어라인을 차례로 고른다. 뼈대는 같은데 산세리프는 담백하게, 슬랩은 단단하고 기계적으로, 헤어라인은 날카롭고 화려하게 보인다. ② 세리프 길이를 2까지 늘린다. 이웃 글자의 세리프끼리 부딪혀 낱말이 쇠사슬처럼 이어진다. 세리프가 글자 사이 간격까지 바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헤어라인을 고르고 보는 크기를 8 아래로 내린다. 가는 세리프가 화면 픽셀보다 얇아져 사라진다. 슬랩은 작은 크기에서도 남는다. (모든 글자는 이 장에서 사각형·타원 조각으로 직접 그린 모형 글꼴이다. 아래 줄은 실제 픽셀 크기로 그린 뒤 확대했다.)

세리프가 글줄을 따라 눈을 이끌어 본문을 더 잘 읽히게 한다는 말이 오래 전해졌다. 그럴듯하지만, 세리프와 산세리프를 비교한 연구들은 매체와 크기, 독자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냈고 뚜렷한 차이를 찾지 못한 연구도 많다. 이 책은 이 말을 통설로 다룬다. 근거는 7장에서 살핀다. 위 시뮬레이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단순한 사실이다. 세리프는 글자의 인상을 바꾸고, 가는 세리프는 작은 크기와 낮은 해상도에서 사라진다.

카운터와 아퍼처: 글자 속의 빈 곳

글자를 읽을 때 우리는 검은 획만 보는 것이 아니다. o의 가운데, n의 아치 아래, e의 위쪽 눈처럼 획으로 둘러싸인 빈 곳을 카운터(Counter)라 한다. c와 e처럼 카운터가 바깥으로 열린 곳의 입구를 아퍼처(Aperture)라 한다. 한도경의 말 "글자도 그림처럼 사이를 본다"는 글자 사이만이 아니라 글자 안의 빈 곳에도 해당한다.

카운터와 아퍼처는 글자가 작아지거나 멀어지거나 흐려질 때 진가를 드러낸다. 아래 시뮬레이터에서 c, e, o를 굵게 하고 아퍼처를 닫은 뒤, 흐림 슬라이더로 멀리서 보는 모습을 흉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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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곳이 닫히면

o의 카운터 넓이(겉넓이에 대한 비율)—
c의 입구 ÷ 획 굵기—
해볼 것: ① 흐림을 5로 올린다. 처음 값에서는 c, e, o가 여전히 구별된다. ② 아퍼처를 8°까지 닫는다. 흐린 상태에서 c와 o가, e와 o가 거의 같은 동그라미가 된다. 입구가 좁은 글꼴이 작은 크기에서 헷갈리기 쉬운 이유다. ③ 아퍼처를 다시 열고 굵기를 0.34까지 올린다. 이번에는 카운터 자체가 메워져 검은 점이 된다. 아주 굵은 글꼴은 큰 제목에는 힘이 있지만 작은 본문에서는 빈 곳이 사라진다. (c, e, o는 이 장의 모형 글꼴로 그렸다. 흐림은 그림을 작게 줄였다가 다시 키워 흉내 냈다. 입구 크기는 두 획 끝 사이의 세로 거리다.)

큰 카운터와 넓게 열린 아퍼처는 공항과 도로 표지판용 글꼴에서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성질이다. 멀리서, 빠르게, 비스듬히 읽어야 하는 글자일수록 빈 곳이 넉넉해야 글자끼리 덜 헷갈린다. 반대로 아퍼처가 좁고 카운터가 작은 글꼴은 크게 쓰면 단단하고 긴장감 있게 보인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크기와 거리, 곧 쓰임이 정한다(7장, 12장).

부분뜻어디서 보나
스템(Stem)글자의 주된 세로획l, n, H의 기둥
보울(Bowl)카운터를 둘러싼 둥근 획b, d, o, p
아치(Arch)스템에서 뻗어 나온 둥근 지붕n, h, m
암·크로스바(Arm, crossbar)한쪽 또는 양쪽이 이어진 가로획E의 팔, H와 e의 가로획
터미널(Terminal)세리프가 아닌 획의 끝c, e, a의 끝
카운터 · 아퍼처획으로 둘러싸인 빈 곳 · 그 입구o의 속, c와 e의 열린 곳

오버슈트: 눈을 위한 거짓말

그림 1에서 d의 둥근 획이 x높이 선을 살짝 넘는 것을 보았다. 실수가 아니다. 같은 높이의 네모와 동그라미를 나란히 놓으면 동그라미가 더 작아 보인다. 동그라미는 꼭대기와 바닥에서 선에 한 점으로만 닿고, 그 근처는 네모보다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꼴 디자이너는 o, c, s 같은 둥근 글자를 선보다 조금 위아래로 넘치게 그린다. 이것을 오버슈트(Overshoot)라 한다. A나 V처럼 뾰족한 꼭짓점은 닿는 면이 더 작아서 더 많이 넘친다.

비슷한 보정이 하나 더 있다. 같은 굵기의 가로선과 세로선을 놓으면 가로선이 더 굵어 보인다. 그래서 대비가 거의 없어 보이는 산세리프에서도 가로획은 세로획보다 조금 가늘게 그린다. 아래 시뮬레이터에서 오버슈트 슬라이더를 0에서 올리고, 가로획 보정을 켜고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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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높이가 같아 보이게

원의 지름 ÷ 네모의 높이—
Source Serif 4의 o 실측 오버슈트—
Inter의 o 실측 오버슈트—
해볼 것: ① 오버슈트 0에서 세 도형을 본다. 수치로는 셋 다 같은 높이인데 원과 삼각형이 작아 보인다. ② 오버슈트를 2~3%까지 올린다. 원이 위아래로 선을 넘는데도 이제야 네모와 같은 크기로 보인다. 삼각형의 꼭짓점은 원의 두 배만큼 넘치게 했다. ③ 10%까지 올리면 원이 확실히 커 보인다. 보정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일 때만 보정이다. ④ 가로획 보정을 켜고 끄며 오른쪽 십자와 H를 본다. 보정을 끄면 가로획이 더 무거워 보인다. (실측값은 이 페이지에서 브라우저가 측정한 o와 x의 윤곽 높이 차이를 x높이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측정값이 보여 주듯 실제 글꼴의 오버슈트는 x높이의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 본문 크기에서는 픽셀 하나도 안 되는 차이지만, 이 보정이 없으면 o가 들어간 낱말마다 그 자리가 움푹 들어가 보인다. 숫자로 같은 것과 눈으로 같은 것은 다르고, 타이포그래피는 언제나 눈의 편을 든다. 이 원칙은 글자 사이의 간격을 다루는 5장에서 다시 만난다. 수치상 같은 간격이 눈에는 고르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왜 가로선이 더 굵어 보이는가 같은 굵기의 가로선이 세로선보다 굵어 보이는 현상은 오래전부터 글꼴 디자이너와 화가들이 경험으로 알고 보정해 왔다. 지각 심리학에서는 같은 길이의 세로선이 가로선보다 길어 보이는 수직–수평 착시가 잘 알려져 있고, 굵기의 차이도 이런 방향에 따른 지각의 비대칭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설명이 있다. 다만 글자 획의 굵기에 대해서는 원인이 하나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원인보다 실무다. 대부분의 글꼴은 가로획을 세로획보다 몇 퍼센트에서 수십 퍼센트까지 가늘게 그리고, 그래야 고르게 보인다.

글자 한 벌의 뼈대를 늘려 보기

지금까지 따로 본 성질들, 곧 x높이와 어센더, 획의 굵기와 대비, 축, 세리프를 한꺼번에 움직여 본다. 아래의 글자들은 모두 이 장의 모형 글꼴이다. 캡하이트를 기준(1)으로 두고, 오른쪽 끝의 손잡이로 x높이, 어센더, 디센더 선을 위아래로 끌면 글자가 따라 늘어난다. 슬라이더로 굵기와 대비, 너비를 바꾸고, 축과 세리프를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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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한 벌 만들기

오른쪽 끝 손잡이로 선을 끈다
x높이 ÷ 캡하이트—
E의 세로획 ÷ 캡하이트—
굵은 획 : 가는 획—
어센더 ÷ 캡하이트—
해볼 것: ① x높이 손잡이를 캡하이트까지 끌어 올린다. n과 h, o와 b를 구별하는 것은 어센더뿐인데 그 차이가 사라져 낱말이 무너진다. 반대로 x높이를 캡하이트의 절반 아래로 내리면 소문자가 작아져 같은 크기에서 읽기 어려워진다. ② 대비를 0.9까지 올리고 세리프를 헤어라인으로 바꾼다. 18세기 말의 화려한 활자를 닮아 가지만, 가로획과 세리프가 실처럼 가늘어진다. 다시 대비를 0으로, 세리프를 슬랩으로 바꾸면 타자기와 포스터의 글자가 된다. ③ 굵기를 0.34까지 올린다. 카운터가 닫혀 b, o, p가 검은 덩어리가 된다. ④ 너비를 0.7로 줄이고 굵기를 올리면 좁고 굵은 제목용 글자의 인상이 된다. (모형 글꼴은 사각형과 타원 조각으로 만들었다. 대비는 가는 획 = 세로획 × (1 − 대비)로 정했고, 기운 축은 카운터 타원을 20° 돌려 만들었다. 실제 글꼴 디자인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보정이 들어간다.)

손잡이 몇 개로 같은 뼈대가 전혀 다른 글꼴처럼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대비가 낮고 세리프가 없으며 x높이가 높으면 오늘날의 화면용 산세리프에 가깝고, 축이 기울고 대비가 중간이며 브래킷 세리프가 있으면 오래된 책의 활자에 가깝다. 이렇게 글자의 여러 성질이 함께 움직이는 묶음이 곧 글꼴의 "갈래"다. 다만 실제 글꼴들은 이 묶음 사이 어딘가에 있어서, 갈래의 경계는 생각보다 흐리다(4장).

모형은 글꼴 디자인이 아니다 이 장의 모형 글꼴은 성질 하나하나를 떼어 보기 위한 도구다. 실제 글꼴은 획이 만나는 곳을 가늘게 깎고(잉크 트랩), 곡선의 장력을 글자마다 다르게 주고, 수천 쌍의 글자 간격을 따로 맞춘다. 모형으로 만든 글자를 로고나 간판에 그대로 쓰면 어딘가 어색하게 보인다. 레터링은 이 장의 비례를 출발점으로 삼되 손으로 다시 그려 다듬는다(12장).

서윤의 여름 조판 노트

CASE 서윤조판 노트 · 2장

간판의 E는 한글보다 가늘어 보였다

서윤은 간판 "책방 E"의 첫 스케치를 컴퓨터에서 했다. 한글 "책방"은 손으로 그렸고, E는 가지고 있던 산세리프 글꼴의 보통 굵기를 그대로 키워 붙였다. 1.8 m 폭으로 출력해 서점 건너편 골목에서 보니, E가 한글 옆에서 유난히 가늘고 작았다. 간판은 가을에 정한 책방 초록(#2f7d5b) 바탕에 크림(#ffe2d7) 글자로 할 생각인데, 두 색의 대비는 이 책의 모델로 4.1:1이라 아주 높지는 않다. 가는 획은 멀리서 바탕에 먹혔다.

서윤은 이 장의 측정 방법으로 기준이 될 만한 글꼴을 쟀다. Inter 보통 굵기(400)의 E는 세로획이 캡하이트의 약 13%, 가로획이 약 11%였고, 굵게(700)는 세로획 약 20%, 가로획 약 17%였다. 처음 붙인 E는 보통 굵기였으니 한글의 굵은 획 옆에서 가늘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도경은 출력물을 거꾸로 돌려 보더니 "E의 가운데 팔이 아래로 처져 보인다. 가로획이 세로획보다 무거워 보이는 것도 있고"라고 했다.

서윤의 선택은 보통과 굵게의 사이, 그리고 멀리서 볼 간판에 맞춘 비례였다. 세로획은 캡하이트의 16%로 Inter 보통 굵기보다 3할쯤 굵게 했다. 가로획은 시각 보정을 넣어 세로획의 7/8(캡하이트의 14%)로 가늘게 했다. 대비는 1.14 : 1로 낮게 두어, 멀리서도 가로획이 바탕에 먹히지 않게 했다. 가운데 팔은 수학적 중앙(50%)보다 조금 위인 52% 높이에 중심을 두고, 길이는 위 팔보다 짧게 해서 아래 칸이 위 칸보다 넉넉해 보이게 했다. 간판 아래쪽의 작은 영업시간 줄 "open 11–20"은 E보다 상대적으로 굵게 정했다. 작은 글자는 멀리서 먼저 가늘어지기 때문이다. 숫자는 대문자 높이에 맞춘 라이닝 숫자로 정해 줄의 윗선이 고르게 했다.

이 장에서 정한 것간판 로고타입 라틴 부분의 비례(E의 캡하이트 H를 1로): 세로획 0.16 H, 가로획(위·가운데·아래 팔) 0.14 H(세로획의 7/8, 대비 1.14 : 1), 팔 길이 위 0.60 H · 가운데 0.54 H · 아래 0.62 H(아래 팔이 가장 길다), 가운데 팔 중심 높이 0.52 H, 세리프 여부는 미정. 영업시간 줄 "open 11–20": x높이 0.30 H, 숫자와 대문자 높이 0.42 H(라이닝 숫자, x높이 ÷ 캡하이트 0.71), 세로획 0.075 H(자기 캡하이트의 18%), 둥근 획(o, p, 0, 2)의 오버슈트는 자기 높이의 2%. 예를 들어 E의 캡하이트를 24 cm로 하면 세로획은 3.8 cm, 영업시간 줄의 x높이는 7.2 cm다. 실제 크기는 한글 "책방"과 맞춰 정한다.
아직 남은 문제한글 "책방"의 받침 때문에 두 글자의 높이와 무게가 들쭉날쭉하다. E의 캡하이트를 한글의 어느 높이에 맞춰야 하는가. 한글에는 x높이도 기준선도 라틴 글자와 같은 방식으로 있지 않다.
다음 단계3장: "책방" 두 글자를 네모틀과 탈네모틀로 비교하고, 받침 처리를 정한다.

핵심 정리

  1. 라틴 글자는 기준선, x높이, 캡하이트, 어센더, 디센더의 다섯 줄에 맞춰 선다. 줄의 순서는 같아도 간격은 글꼴마다 다르고, 그 간격이 글꼴의 인상을 정한다.
  2. 글자 크기는 글자가 아니라 em 상자(활자의 몸통)의 크기다. 같은 크기라도 x높이가 높은 글꼴이 커 보이므로, 글꼴을 바꾸면 크기를 x높이 기준으로 다시 맞춘다.
  3. 획의 대비와 축은 납작한 펜촉의 각도에서 왔다. 펜촉 각도가 축이 되고, 획의 방향이 굵기를 정한다.
  4. 세리프는 모양(브래킷, 슬랩, 헤어라인)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고, 가는 세리프는 작은 크기와 낮은 해상도에서 사라진다. 세리프가 본문을 더 잘 읽히게 한다는 말은 통설이다.
  5. 카운터와 아퍼처, 곧 글자 속의 빈 곳이 작은 크기와 먼 거리에서 글자를 구별하게 해 준다. 획이 굵어지거나 입구가 닫히면 c, e, o가 헷갈린다.
  6. 오버슈트와 가로획 보정처럼 글꼴은 숫자를 일부러 어긋나게 해서 눈에 고르게 보이게 한다. 타이포그래피는 수치보다 눈의 편을 든다.

확인 퀴즈

1. 보고서의 글꼴을 바꾸면서 크기는 11포인트 그대로 두었더니 글이 눈에 띄게 작아 보였다. 가장 알맞은 설명은?

11포인트는 어느 글꼴에서나 em 상자의 높이다. 그 안에 소문자를 얼마나 크게 그리는지(x높이)는 글꼴마다 다르고, 본문의 체감 크기는 주로 x높이가 정한다. em 상자의 크기 자체는 글꼴마다 다르게 정의되지 않으며, 세리프나 디센더가 소문자를 줄이는 것은 아니다.

2. 끝이 납작한 펜을 수평에서 30° 기울인 채 각도를 바꾸지 않고 o를 썼다. 획이 가장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납작한 펜촉은 펜촉 가장자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 가장 가는 선을 낸다. 30° 기울인 펜으로 o를 쓰면 접선이 30° 방향이 되는 왼쪽 위와 오른쪽 아래가 가늘어지고, 축이 왼쪽으로 30° 기운다. 맨 위와 맨 아래가 가장 가는 것은 펜촉이 수평(0°)일 때다.

3. 같은 높이로 그린 네모와 동그라미를 나란히 놓았더니 동그라미가 작아 보였다. 글꼴 디자이너가 쓰는 해결책은?

동그라미는 선에 한 점으로만 닿아 같은 높이의 네모보다 작아 보인다. 그래서 둥근 글자는 기준선과 x높이·캡하이트를 몇 퍼센트 넘치게 그린다. 뾰족한 꼭짓점은 더 많이 넘친다. 획을 가늘게 하면 오히려 더 작아 보인다.

4. 멀리서 읽어야 하는 안내 표지용 글꼴을 고른다. 이 장에서 본 성질만으로 판단할 때 더 알맞은 쪽은?

멀리서 보면 글자는 흐려진다. 이때 c, e, o를 구별해 주는 것은 넉넉한 카운터와 열린 아퍼처이고, 가는 획과 헤어라인 세리프는 먼저 사라진다. x높이가 낮으면 같은 크기에서 소문자가 작아지고, 카운터가 메워진 굵은 글꼴은 흐려지면 덩어리가 된다.

출처와 글꼴